복음 묵상

기도,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6. 1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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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유리병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오늘 복음 말씀 구절 속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할 것이다." 이 말씀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용서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에도 없는 말,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내뱉는 말들을 빈말이라 부르는 듯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진심을 말하며 관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빈말은 둘 사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칩니다.

 

 연인 사이에서는 서로가 듣고 싶은 사랑의 말을, 수없이 속삭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삭임에는 빈말들이 오고 갈 때도 있지요. 상황이 변하고 서로의 감정이 식었을 때, 이러한 말들은 서로에 대한 배신감으로 변질됩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며, 서로에게 했던 빈말로 인해, 사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기도 하지요.

 

 모든 관계에서 진심은 정말 중요합니다. 빈말을 통해 자신을 포장한 모습으로 형성된 관계는, 지속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진심을 말하기도 전에 알고 계십니다. 어쩌면 기도는 하느님에게 우리의 진심을 알리고자 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진심을 알아차리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진실된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이어 주기도 하지만, 자신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기도를 할 때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은 직접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그 기도는 오늘날 '주님의 기도'라는 유명한 기도문이 되었지요. 이 기도문의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첫째,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둘째,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셋째,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이지요.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기도는, 단순히 이 세상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문에서 이야기한 하늘과 땅을, 우리가 보는 하늘과 땅만으로 생각한다면, 쉽게 이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비행기와 우주선을 타고 올라가 본 하늘에서는 하느님을 만나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아마도 기도에서 말씀하신 땅은 우리들의 내면을 포함하여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비유에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의 땅임을 알려주셨습니다. 밀밭과 가라지의 비유, 뿌려진 씨앗의 비유,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는 비유들은 하나같이 우리 마음이 땅임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즉 하느님이 창조한 나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 마음을 사랑해줄 수 있는 것이며, 예수님이 청하신 기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를 살게 하소서


 양식과 용서는 우리를 살게 하는 것들입니다. 하루하루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양식과, 우리의 힘을 갉아먹어버리는 분노와 미움을 사라지게 하는 용서는, 우리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요소입니다. 일용한 양식은 먹는 음식은 물론, 마음의 양식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공허함을 느낄 때, 음식을 찾는 경우도, 에너지를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행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을 항아리에 붓더라도, 항아리에 구멍이 있다면, 그 항아리는 금방 비어버리게 됩니다. 용서는 깨지고 구멍 난 마음속 항아리를 메워주는 작업일지도 모릅니다. 용서는 단순히 누군가의 잘못을 이해해주는 것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자신이 과도하게 힘을 소비하고 있는 곳을 알아차리고, 그곳에 과도하게 힘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도 용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괴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괴로움이 반복되고 심해질 때면,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라며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 때도 있지요. 이러한 괴로움은 우리가 "용서"해야 할 것이 있음을 알려주는 우리의 신호와도 같습니다. 괴로움은 과도하게 자신이 힘을 주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통증을 통해, 상처가 난 부위를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의 구멍도 괴로움을 통해 찾아낼 수 있습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남들을 보는 것이 아닌, 괴로워하고 있는 나를 조금 더 바라봐주고, 마음속 구멍을 찾아낸다면, 우리가 할 일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그 구멍을 메우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혹과 악에서 구하소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우리 존재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유혹에 빠지며,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늘 결백하고 깨끗하며, 예쁘기만 한 존재가 아닙니다. 기도는 이러한 우리의 상태를 고백하고 인정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가 완성이 아닌 시작임을 이렇게 일깨워주십니다.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예수님의 세 가지 기도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스스로의 상태를 외면하고,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며 드리는 기도는 빈말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라는 기도문이 빈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며, 하느님의 이끄심을 청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복음 마지막 부분에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역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네가 먼저 주면 나도 줄게."라는 식의 거래 제안이 아닙니다.

 

 형제는 우리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짜장면을 친구들과 함께 먹을 때를 떠올려봅니다. 맛있게 짜장면을 먹고 있는 친구의 얼굴에 짜장면이 튄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 친구에게 그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자신의 얼굴에도 짜장면이 튀지는 않았을지 확인해봅니다. 이처럼 주변 사람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볼 수 없는 자신의 내면은 알아차릴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들에게 보이는 허물이, 내 안의 허물을 찾게 도와주기도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찾은 다른 이들의 허물을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상대가 특정한 부분에 과도한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허물 역시 결코 바라봐주지 못하겠지요. 

 

 허물은 성장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산물이기도 합니다. 허물을 발견했다는 것은, 또다시 우리가 성장하고 나아갈 수 있음을 발견한 것과도 같습니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시작입니다. 하느님은 타인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도 그러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 즉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해주신 하느님의 용서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타인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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