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누군가가 나에게 강요할 때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6. 1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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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있는 두 사람
걷고 있는 두 사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예수님께서는 부탁도 아닌 "강요"한 내용을, 상대가 요구한 정도보다 더 함께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 괴로움 중에는 타인의 행동과 개입, 그리고 강요로 시작되는 괴로움들도 있지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그들의 모습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에게는 악인에 가까워 보일 것입니다. 그러한 대상들에게 우리는, 우리를 괴롭게 한만큼, 똑같이 그들을 괴롭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의 눈을 뺏어간 사람의 눈을 뺏고자 하고, 나의 이를 뽑아간 사람의 이를 뽑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상대방으로 인해 괴로워진 나의 마음을, 그 사람에게 그대로 느끼게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잠시 멈추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렇다면 부당한 강요를 무작정 참으면서, 괴롭힘을 허용하고 묵인하라는 말씀일까요? 

 

괴로움의 2차 피해


 신체적 괴롭힘, 또는 감정적 괴롭힘은 처음에는 외부의 어떤 자극으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스스로를 또다시 괴롭히는 2차적인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지요. 어떠한 자극이 우리를 순간적으로 괴롭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자극이 평생을, 또는 오랜 기간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순간의 괴로움을 우리는 평생의 괴로움으로 증폭시킬 때가 있습니다. 괴로웠던 순간을 되뇌며, 우리를 괴롭게 한 그 대상에게 괴로움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그 괴로움을 간직하려는 선택을 할 때에 그러하지요.

 

 괴로움은 마치 독과도 같습니다. 괴로움을 느낀 순간 우리는, 유입된 괴로움을 바로 배출시킬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안에 지니고 있을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독을 계속 품으며, 상대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독을 키워간다면, 독은 점점 상대가 아닌, 우리의 마음 안에서 퍼져가게 됩니다. 결국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괴로움이 우리 자신에게 먼저 더해지는 격이 되어버리지요.

 

 또한 타인의 공격과 강요에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죄책감이 독이 되어 괴롭힐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책과 죄책감은 역시, 외부에서 유입된 독을 스스로에게 퍼지도록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뱀 또는 벌에 물렸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물린 순간,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려서 생긴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 집중하며, 외부에서 유입된 이물질을 제거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합니다. 만약 물려서 생긴 상처가, 본인의  부주의로 일어난 것이라 판단한다면, 스스로를 향한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닌, 경험을 통한 학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방


 예수님은 우리가 괴로움이라는 독침에 찔렸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를 알려주십니다. 보통 타인으로 인한 괴로움은, 나의 의사를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의사를 "강요"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강요를 마주할 때, 오히려 그 사람의 요구보다 더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처방에는 아주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상대의 호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강요, 즉 상대가 주입하려는 독을, 나의 선택, 즉 나의 여정의 시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법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자유가 침해된다고 느낄 때, 상대의 강요가 부당하다고 느낄 때, 쉽게 불행과 괴로움에 빠져버립니다. 심지어, 그러한 강요에 맞서 싸우면서 에너지를 소비하다 보면, 강요대로 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이라는 독이 퍼져버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강요를, 애초에 나의 선택으로 바꾸어버린다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여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삶이라는 영화 속에서 부여받은 하나의 미션처럼 말이지요.

 

 이러한 선택은 우리에게 여유를 가져다줍니다. 반대로 이러한 선택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마련해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경험을 통해, 몸소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평화는 결코 상대에 의해 깨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상대를 꺾어 누르면서 이기는 법이 아니라, 상대의 목소리를 들어주면서 이기는 지혜를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상대의 강요를 들어주면서, 그 사람에게 종속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달라는 자에게는 무조건 주어야 한다는 행동 자체에 꽂혀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상대의 강요를 들어주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 평화가 깨지는 것보다 훨씬 낫기에, 우리는 더 좋은 것을 택할 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상대가 요구한 것보다 더 들어줄 수 있을 만큼, 그 자체에 개의치 않는 우리가 되길 바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가 요구한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그것보다 우리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훨씬 더 중요하고 값지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히브리서 20장 34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