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닌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6. 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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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방, 그리고 문

너는 기도할 때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예수님은 기도할 때,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직접적으로 말씀해주십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쉽게 마음에 와닿지는 않습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올바른 기도 자세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을지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보이기 위해 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보이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자선을 베풀 때에는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도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은 의로운 행동 자체보다, 그 행동을 행하는 마음을 더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자신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택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하나의 규칙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의 특성이지요. 눈앞에 놓여진 두 음식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면, 누구나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을 고를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스스로 중요하다고 느끼는 가치가 개입되면서, 다른 선택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다이어트를 위해, 맛있는 음식보다는 살이 덜 찔 음식을 고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기 위해, 자신이 덜 맛있어 보이는 것을 고를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향하게 됩니다.

 

내면에 귀를 기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선자는, 의로움을 선택하는 이유가 자신의 내면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더 큰 가치를 두었기에, 그 사람은 결국 타인의 평가를 따라가게 됩니다. 이처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은, 스스로를 타인의 종으로 만드는 것과 같기에 불행을 자초합니다.

 

 믿음으로 순교를 택했던 이들을 떠올려봅니다. 자신이 영웅이 되고자 죽음을 택한 이들을 순교자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 세상의 잣대보다, 내면에서 느꼈던 하느님을 더 중요시 여겼기에, 순교라는 선택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믿음에서 본받고자 하는 모습은 무모함이 아닙니다. 순교자의 믿음이 용기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믿음의 이유를 타인의 대우에서 찾지 않고, 내면에서 느꼈던 어떠한 가치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기도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의로움이 남들의 시선이 아닌, 내면에서 비롯되야함을 이야기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기도도 마찬가지임을 알려주시지요.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할 때,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로 무엇을 전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그리고 숨어계신 아버지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기도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기도는 무언가를 청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를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막연히 '저 사람이 하느님과 관계가 좋구나', 또는 '열심히 하느님을 따르고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는 기도하는 모습 자체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기도하는 모습을 부각하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하느님과의 관계가 좋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친하게 지내는 유명인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보통 정말 관계가 가깝고, 그 유명인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과 그 유명인의 관계를 부각하지 않습니다. 유명인이 지니고 있는 후광으로 득을 볼 자신의 이익보다, 자신의 실수로 손상될지 모르는 유명인의 명예에 더 마음을 두기 때문이지요. 유명인과 어설픈 관계일수록, 그 사람과의 친분을 과시합니다. 또한 그 관계로 인하여 과도한 이익을 탐하는 사람일수록 더 그러하지요.

 

나만의 골방


 기도는 분명 우리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보여지는 형태로 드러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내면에 숨어계신 하느님이지요. 기도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감추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내놓는 말과 감정, 그리고 생각들은 늘 예쁠 수만은 없기에 우리만의 기도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진심으로 드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문을 닫아놓을 수 있는 우리만의 골방이 절실히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추악한 마음조차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그러한 골방 말입니다. 

 

단식, 그리고 반성


 단식을 할 때에도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지 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의 단식에는 반성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대중매체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의 사죄의 영상과, 자숙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침울한 표정과 몸짓에도 불구하고, 정작 진정한 뉘우침을 거치지 않는 경우도 많지요. 우리는 진정한 반성과 참회가 원통하고 침울한 표정이 아닌,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단식, 진정한 반성과 속죄는, 우리의 표정처럼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단식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섭취했던 음식이 전부 소화되고, 몸에 저장된 에너지마저 전부 소모될 만큼, 단식의 기간은 깁니다. 우리에게 단식, 즉 반성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잘못된 선택의 동기가 된 우리의 욕심의 섭취를 멈추고, 그것이 전부 소모될 때까지 스스로를 기다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분명 숨어있는 것도 보실 수 있기에, 반성을 통한 우리 내면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