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어진 권한
마음속 악한 생각
오늘 복음 말씀 구절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악한 생각은 무엇일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중풍 병자가 찾아오다
예수님 앞에 어느 날 중풍병자가 찾아옵니다.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그 중풍병자를 살리겠다고, 지인들이 힘을 모아 예수님 앞에 찾아온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기에, 중풍 병자에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병"이란, 단순한 건강 상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몸에 생긴 병을, 신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더 괴롭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풍 병자 역시,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신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신적인 괴로움
정신적인 괴로움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자신을 끌어내리면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단죄가 반복되다 보면, 생기를 잃고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도 하지요. 그 사람을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관심과 응원을 건네보지만, 스스로를 끌어내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중풍 병자에게, 조금은 어색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용기와 용서를 말씀하시는 의도를 쉽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 것입니다. 그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바라보셨기에,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건네신 것일 테지요.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와 같은 스스로에 대한 불신은, 두려움이 되어 그를 묶어두었을 것입니다. 또한, 부정적인 생각 끝에, 스스로를 비난하고 죄책감에 사로 잡혀, 온몸과 마음에 힘이 빠지고 떨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유해주실 때, 단순한 그 증상들 보다 아픔의 원인과 뿌리를 찾아 치유해주십니다.
증상이 아닌 원인을 치유하다
예수님은 분명, 중풍 병자가 괴로워하고 있는 부분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마음의 병은 몸의 병이 되고, 몸의 병은 마음의 병이 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아픔이란, 스스로에게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몸과 마음의 신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소홀히 여겨, 자신에게 필요한 관심을 가져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늘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십니다.
아픔의 증상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영역으로 안내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증상 자체를 해결하기보다, 그러한 증상이 발현되는 원인을 찾고 해결해야, 비로소 아픔이라는 우리 몸과 마음의 경보가 멈추게 되겠지요. 예수님은 스스로에 대한 진정한 격려와 용서가 필요한 중풍 병자를 대신하여, 그에게 용기와 용서를 말씀을 건네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이미 너를 용서하셨으니, 스스로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아도 된단다. 그리고 용기를 내자꾸나. 내가 너를 항상 붙들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거라. 너와 내가 너 자신을 함께 믿어준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이지 않았을까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을 들은 군중은, 하느님의 유일한 권한이라고 생각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는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을 걷게 하는 것과, 죄를 용서하는 것을 비교하며, 어느 쪽이 더 쉬운지를 되물어보십니다. 사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물론, 세상의 모든 권한은 하느님에게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걸을 수 있는 것도, 말할 수 있는 것도,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느님께서 그리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권한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행위로, 그 권한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하느님의 권한 중 일부를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권한들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에 분명한 제한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에게 숨을 쉴 수 있는 권한은 주어졌지만, 계속해서 숨을 멈출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누군가는 걷을 수 있는 권한을 받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누군가를 걷지 못하게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지요.
죄에 대한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용서라는 권한도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며, 하느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용서도 우리에게 부여된 다른 권한과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를 할 수는 있으나, 누군가가 용서받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에 대한 전적인 본래의 권한은,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되는 예수님은, 단지 하느님의 권한만을 강조하고자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게로부터 온 권한들이 우리 사람들에게도 부여되었음을, 직접 사람이 되어 보여주시고, 또 알려주십니다.
찬양, 하느님의 권한을 마주하다
걷지 못하던 누군가가 걸을 수 있게 되는 상황을 본다면, 우리는 그 권한을 지닌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될 때도, 그 권한을 지닌 하느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권한을 침범하며, 하느님을 자처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권한을 외면하며, 괴로움에 빠져 살아가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일 테지요.
우리에게는 숨을 쉴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숨을 멈출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용서받지 못하게 할 권한이 없습니다. 사랑받지 못하게 할 권한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허용된 권한들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한 우리의 삶 안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허락되는 동안,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마음껏 행사해봅시다. 그러다 권한 밖의 일들이 해결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함께해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쁘게 살아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