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7. 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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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사람
손, 그리고 사람

 

의인이 아닌 죄인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씀은 죄를 짓지 않는 것에만 몰두하며, 의인이 되어야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나를 따라라


 예수님은 길을 걸으며 일행이 될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또한, 제자가 될 사람들을 직접 부르시며 "나를 따라라."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여정으로 초대하기도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덕망 높은 바리사이들과, 지식이 풍부한 율법학자들, 그리고 평판이 좋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로 삼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당시 역적과도 같이 여겨지는 세리, 천하게 여겨지던 창녀, 소외된 계층인 과부와 어린아이들과 어울려 지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의인으로 평가받는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실과 태도에 많은 불만을 지녔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에는 이미 무엇이 깨끗하고, 무엇이 더러운 것인지를 나누는 잣대가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인과 죄인을 극명하게 나누며, 죄인과는 구별되는 삶을 사는 것이, 스스로를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남과 나를 나누는 잣대


 사람의 심리에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미워하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른 존재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결점에 분노하면서, 혹은 그것을 드러내고 비난하면서, 자신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없다는 위안을 삼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 안에 무엇이 있고, 또 무엇이 없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무언가에 대한 집착은, 그것이 자신에게는 없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격한 거부반응과 미움은, 그러한 모습이 자신에게도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기인할 때도 있지요.

 

 타인을 극명하게 나누는 자신의 잣대는 결국,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스스로에게 돌아옵니다. 의인과 죄인으로만 사람들을 나누어 생각했던 바리사이의 내면을 바라봅시다. 그들은 타인을 분명하게 구별한 것처럼, 자신의 내면도 철저하게 구별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운 말과 행동들은 밖으로 표출시키는 반면, 자신의 의롭지 못한 추악한 모습은 더욱 깊은 곳으로 억누르면서 말입니다.

 

자신을 미워하다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스스로 원하는 모습만을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환상은 마치 자신을, 아픈 부분이 없는 완벽한 인간상으로 착각하게 만들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롭지 못한, '죄'라고 판단되는 자신의 그림자가 여전히 내면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두 모습 사이에서 커다란 괴리가 발생하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은 분노가 되어, 스스로를 괴롭히고 남들을 향한 미움으로 표출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하는 것이 불만이었던 바리사이들에게, 자신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의인으로 평가받는 바리사이들을 배제시키고, 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과만 어울리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리사이의 내면에 공존하는 모습 중,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평가하는 마음을 칭찬하고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라고 생각하며 감추고 부정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부끄럽고 수치스러우며,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보듬어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희생 제물이 아닌, 자비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닌, 자비다"라는 말씀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시간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바쳐왔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며, 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희생 제물이 아닌, 자비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하느님이 우리의 의로운 모습과 예쁜 마음만을 좋아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말과 생각과 행동이 예쁘고 아름답기만 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꿈꾸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처럼 예쁨을 받기 위한 치장에만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진정한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관계를 겪게 됩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요. 어쩌면 인류의 공통된 걱정이 바로 "관계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라는 것은, 자신이 잘 보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망가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관계에서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관계에 있어서, 상대가 좋아할 것 같은 모습을 부각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닌, 만들어진 자신과 지속되었던 교류는, 상대와의 친밀감을 떨어뜨립니다. 결국 그 관계에서는 회의감이 느껴질 것이고,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해질 테지요.

 

자비, 모든 것을 받아들이다


 희생 제물을 위한 우리들의 제단 위에는 하느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 것만 올라갑니다. 때로는 하느님이 좋아할 것 같은 모습으로 무언가를 포장하여 올려놓기도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희생 제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발가벗겨진 채 올려진, 십자가를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어찌하여 자신을 버리셨습니까!"라는 외치셨던 예수님의 모습도 떠올려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전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입으로 두려움과 고통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모습을 받아들이고 내어놓으며, 하느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느님과의 교류를 위해서는 "자비", 즉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비가 선행되어야,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누군가와 교류할 수 있습니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도 베풀어야 할 덕목입니다. 자비는 선과 악을 나누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아주며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간


 누군가가 정말 의롭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법 없어도 법을 지킬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고는 합니다. 누군가가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혹은 특정한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온전한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닐 테지요. 우리는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 너무 서두를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결점들을 너무 빨리 변화시키려 하는 마음은,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주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몸에 난 상처에 자리 잡은 피딱지가 보기 싫다며, 빨리 새 살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그것을 떼어버린다면, 그곳에는 다시 상처가 생깁니다. 우리는 건강한 존재가 되기 위해, 수많은 상처와 회복을 반복합니다. 상처 부위가 보기 싫다고, 당장 도려내는 것은 치유가 아닙니다. 충분한 회복이 될 수 있도록, 치유의 시간을 기다려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느새 건강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죄라고 생각하는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이는 이야말로 진정한 의인이 될 수 있으며, 자신의 죄를 알고 자비를 청하는 죄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인지를 판단하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그리고 스스로에게 내어놓지 못하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기다려줄 수 있는 "자비"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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