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심판하지 마라
오늘 복음 말씀 구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남들을 심판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남들을 심판한 우리가 받을 심판은 무엇일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남을 심판한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남들을 심판하면, 우리도 심판받을 것이라고도 이야기하십니다. 하지만 평생을 남들을 심판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단점과 결점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들 중, 유난히 우리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의 단점과 결점은 더욱 커다랗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 결점들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며, 우리가 그것을 고치려 하는 마음이 심판으로 이어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타인의 잘못된 행동, 또는 그들의 결점들을 그냥 방관하며 받아주기만 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현대 사회에서 적용되는 법을 예로 떠올려봅시다. 누군가가 나쁜 짓을 하였다면, 법적인 절차를 거쳐 처벌을 받습니다. 판사는 해당 죄에 부합하는 형을 선고하고, 정해진 방법으로 형이 집행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무시하고 개인이 임의적으로 심판과 집행을 수행한다면, 그 사람 역시 또 하나의 범죄자로 분류되어 재판에 넘겨지게 됩니다.
심판받는 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 또한, 하느님만이 수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닌, 하느님의 몫으로 두어야 합니다. 완전하지 못한 우리의 시각은 정당한 심판을 내릴 수 없을뿐더러, 자신의 입장이 개입된 상태에서, 누군가를 올바르게 심판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심판이라는 말을 들으면, '최후의 심판'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죽고 나서야 받는 심판 외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는 다양한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삶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죄를 짓는 순간에도,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그 길을 더 이롭다고 생각했기에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선택 이후에 일어난 변화로 인해, 자신의 생각과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자신의 잘못 혹은 결점을 시행착오를 통해 알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늘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의 참된 목적은, 그 대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다시 살리는 것에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심판하지 말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시간을 뺏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섣불리 재판장이 되어, 타인의 잘못을 심판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알아채고,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시간을 뺏어버리는 격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심판하려는 마음 안에는, 사랑보다 분노, 불안 혹은 이기심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누군가가 변하기를 바란다면, 그들을 심판하려는 마음보다, 그들이 충분한 경험과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마음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티끌, 그리고 들보
예수님은 자신의 눈 안에 있는 들보는 바라보지 못하면서, 어찌 남에게 있는 티끌을 빼내려 하냐고 말씀하십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거슬려하는 누군가의 결점은, 나의 결점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결점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개의치 않는 반면, 누군가에게는 극심한 분노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상대의 결점이 지나치게 우리를 자극한다면, 그 티끌이 우리의 눈 안에 들보로 들어와 있지는 않은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상대의 티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의 그림자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외모를 사랑하지 못하거나, 외모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하게 부여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외모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마찬가지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 사람일수록, 관계성과 관련된 타인의 결점에 민감하게 대처합니다.
사실 상대방의 티끌을 내가 치워버리고자 하는 마음은, 상대의 안위와 평화를 위하는 마음이 아닌, 우리 자신의 편의와 강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눈 속 들보를 먼저 빼낸 사람이야말로, 형제의 눈에서 티끌을 뺄 수 있다는 말은, 그 결점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만이, 타인을 그 결점에서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결점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황이, 더 이상 불행이 아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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