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의 열쇠
오늘 복음 말씀 구절 속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이 구절은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된, 베드로의 일화에 등장하는 이야기로도 유명합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하늘나라와 그 열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구세주인 "사람의 아들"이라는 존재를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 자신의 민족을 불행에서 건져주고, 적들과 맞서 싸워 자신들을 드높여줄, 그러한 존재를 말이지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자신의 생각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누구는 사람의 아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누구는 예레미야라고 하며, 또 누구는 예언자 중 한명일 것이라며 말입니다. 이러한 대답에 예수님은 질문을 바꾸어 묻습니다.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남들은 너를
우리는 어떠한 대상을 바라볼 때, 자신의 시선만을 고려하지는 않습니다. 무언가의 이름을 정할 때도 우리가 부르고 싶은 대로 이름을 붙이기보다, 남들과 합의한 정해진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도 하지요. 사회적 동물이라고도 불리는 인간의 삶에서는, 남들의 시선이 지니는 영향력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너는 나에게
그러나 무언가가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어떠한 존재인지는, 남이 아닌, 내가 받아들이는 영역입니다. 성인군자로 모든 사람에게 추앙받는 사람이, 나에게 칼을 들고 위협하며, 강도짓을 한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성인군자가 아닌 강도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판단은 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요.
우리는 흔히 정치적, 종교적인 사고를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떠한 정치의 방향이 누군가에게는 이득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신이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는 정말 자비롭고 인자한 신이, 도움이 된다고 느낄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책임하고, 권위적인 신이 괴로움을 주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을 알게 되다
그러하기에, 만약 누군가가 하느님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경험, 그리고 생각과 감정 등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기에 가능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주입식 교육을 통해서, 혹은 누군가의 강요를 통해서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겪었던 모든 일과, 예수님을 만나고 느꼈던 모든 감정들, 자신이 지녀왔던 생각들이 어우러져, 예수님의 존재를 느끼고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점을 알고 계셨기에,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삶에서 겪은 모든 일들과, 그가 지녔던 생각과 감정들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모두 닿아있었으니 말입니다.
나에게 너는
베드로는 자신의 삶에서 늘 함께하고 있던 하느님의 손길을 통해, 예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바라보아준 베드로에게, 자신이 바라보는 베드로를 들려주십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라는 말씀 이후에는, 하느님이 바라보고 계시는 베드로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지요. 그렇게 하느님은 자신이 만들어낸 베드로의 진짜 모습, 그리고 세상에서 해나갈 진짜 역할을 알려주십니다.
교회의 반석
예수님은 베드로의 존재를 말씀하신 뒤, 그것을 반석으로 교회를 세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 즉 '하느님과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 단단한 반석인 우리의 존재 위에 지어져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 흔들리지 않을 반석은, 하느님이 만들어낸 우리의 "존재"뿐 입니다. 우리의 살과 피는 점점 사라지지만, 우리의 존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존재를 마주하다
삶을 통해서 나를 이끌어주시는 스승님이, 하느님이심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하느님이 바라보고 있는 진짜 나의 존재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마주한 나의 진짜 존재를 반석으로 삼아, 하느님은 교회를 지으십니다.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건물이 아닌,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투정도 부리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우리의 마음 안에 세우십니다.
우리는 흔히 자존감, 또는 존재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는 어떠한 감정과 조건을 기반으로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존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기 전부터, 있어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우리의 존재는, 남에 의해서, 심지어 자신에 의해서도 사라지거나 망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단한 반석 위에 우리 마음속 교회는, 그 어떠한 세력도 무너뜨릴 수 없는 공간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만 지속될 것 같던 우리의 존재가,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해야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던 자신 존재가, 늘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반석을 찾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다치더라도, 하느님과 교류 안에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자신도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존재는 하느님과의 교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다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건네십니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메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메거나 풀릴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이는 사제들의 권한과 고해성사의 근거가 되는 구절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자신의 참된 존재를 알게 된 사람에게 교회와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을 하늘, 그리고 자신을 땅으로 본다면, 그 둘이 만나게 된 이후,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겼을 것이라 상상을 해봅니다. 자신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고, 자신을 이끌어주는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했을 때, 아등바등 살아오던 모든 일들은, 단지 땅에서만 메고 푸는 행위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자신을 알아차리게 된 사람에게는, 이 땅, 즉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늘에서도 살아가게 될 자신의 존재를 다듬는 일이 되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땅에서 썩어 없어질 것들을 위해, 평생을 고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하늘나라로 올라갈 우리의 존재를 키워나가고 있다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리의 존재 위에 세워진 교회를 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이 진실을 밝혀주는 열쇠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자신의 마음속 교회를 하느님과 함께 세워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키워가는 것이야 말로, 땅에서 메고 푸는 일이, 하늘에서도 메고 푸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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