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신다." 하늘에 떠있는 태양은,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며 빛을 비추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또한, 태양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모두에게 떠오를 하느님의 해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예수님은 오늘도 어김없이 쉽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바로 이웃과 원수, 모두를 사랑하여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모두에게 사랑을 주기에,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이 말씀을 자칫 잘못 받아들인다면, 굉장히 불편한 부분이 많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 나만 그들을 위해 베풀고 사랑해야 하며, 왜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받아주어야 하는가?', '하느님은 신이기에 그러한 것들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인 우리가 어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척 살아가는 것이 바로 위선이고 가식 아닌가?', '거룩함을 들먹이며 현실을 외면하고, 망상에 빠지는 것이 어떻게 올바른 대처가 될 수 있는가?'와 같은 의문점들과 함께 말이지요. 이러한 생각들은 오히려,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더 억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합니다.
더 깊은 사랑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사랑은, 더 뛰어난 사랑이 아닌, 더 깊은 사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타인의 모습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 나에게 예뻐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왠지 모르게 거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도 있지만, 단 한순간도 함께 있지 못할 것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속이면서, 억지로 기쁘게 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모두에게 예쁜 사람이 되어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연인 사이의 알콩달콩함, 그리고 가족 간의 애틋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인간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어쩌면 사랑은, 상대가 우리와 같은 하나의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상대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해주고, 치켜세워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우리들처럼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이기에, 억지로 그 사람의 존재를 파괴하고자 하는 미움이라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완벽한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며, 완전한 사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사랑은
사실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늘의 비처럼, 하느님에게서부터 내려온 것이지요. 모든 존재들은 하느님이 그 존재를 인정해주고 있기에, 즉 사랑하고 있기에 존재가 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에 드는 사람을 인간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힘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인간 이하의 것으로 낮출 수 있는 힘도 없지요.
하느님의 사랑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을 받아들이며, 하느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쁨이 되지만,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괴로움이 됩니다. 같은 해 아래에서 같은 비를 맞는 선인과 악인이지만, 그렇게 둘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입니다.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다 (1) | 2022.06.16 |
---|---|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닌 (2) | 2022.06.15 |
누군가가 나에게 강요할 때 (3) | 2022.06.13 |
예수님께서 주실 모든 것 (1) | 2022.06.12 |
고쳐주고 일으켜 주어라 (0) | 2022.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