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 구절 속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판단이 있을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죽음과 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그러한 예수님의 기적들이 소개되고 있지요. 심지어 이번 복음에서는 질병을 넘어, 죽음을 해결해달라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이 방금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회당장은 다급히 예수님을 찾아와, 딸을 살려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사실 죽음은 여느 질병과 달리, 극복하기 어려운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 어떤 질병보다 큰 고통과 좌절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라는 것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요?
죽음 앞에서
회당장이라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딸의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떠한 힘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회당장은 갑작스러운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딸을 살리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이의 형태로 세상에 나오지만, 모든 사람이 노인이 되어 죽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어머니의 뱃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고통 없이 잠을 자다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예고 없이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방법과 때가 있기는 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모습과 때에 죽음을 맞이할 수는 있는 것일까요?
하늘의 뜻
예수님은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며,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소녀는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 그리고 스스로의 죽음의 때를 섣불리 정해버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죽음은 '하늘에 뜻'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 것입니다. 살인이 죄가 되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폭력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임의로 결정하여 판단하는 것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정할 수 있는 존재는, 그 사람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존재뿐일 테니까요.
받아들임
따라서 죽음은 "받아들임"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우리의 생명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어쩌면, 매일 밤 잠을 청하는 것도 "죽음"이라는 받아들임을 위한 훈련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의식을 내려놓고, 무방비 상태의 숙면에 빠진다는 것은, 언젠가는 다가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매일의 연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하루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많아질수록 잠을 청하기 어려워집니다. 또한 스스로를 포함한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분노, 집착과 소유욕에 사로 잡히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잠에 온전히 들 수 없는 상태는,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분명 죽음의 때는 우리가 정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육체적인 죽음이 아닌,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 버리는 누군가의 죽음은, 절대로 우리의 선택과 판단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 테지요. 예수님의 옷깃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혈루증을 앓던 여자처럼, 우리의 생명이 예수님과 닿아있는 한 지속됨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크게 두렵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명의 근원
자신의 생명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를 모를 때, 우리는 "죽음" 즉 생명이 단절된 상태를 극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두려움이 더 이상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게 되지요. 예수님의 옷깃만 닿아도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은,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치유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활력도, 모두 생명의 근원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생명이 끊기는 순간에 우리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어디에 있든, 예수님을 느끼며 맞닿아있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전해지는 생명의 힘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오늘 더욱 깊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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