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나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8. 1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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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죄를 지으면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일지, 그리고 용서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나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누군가에게 용서를 청하기도 하고, 또 베풀기도 합니다. 신기하게도 용서가 오고 가는 상황에서는 늘 등장하는 말이 하나 있지요.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봐주세요." 하지만 우리는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이러한 상황을 겪어본 듯합니다. 그래도 명색이 수석 제자였던 베드로는 큰 맘을 먹고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이야기하였을 테지요. 누군가를 일곱 번이나 용서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일곱 번, 아니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지요.

 

절대 용서 못해


  살면서 누군가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무작정 용서를 외치는 것은 분명, 괴리감과 분노, 그리고 찝찝함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성직자의 옷을 입고 무작정 범죄자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는 영화 속 장면은, 우리가 바라보는 용서에 대한 시각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말씀하시면서, 탕감의 사례를 비유로 사용하십니다.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세 부류의 등장인물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빚을 탕감해주는 한 나라의 임금이 등장합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빚을 진 그 임금의 종은, 임금에게 빚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탕감받게 됩니다. 

 

 빚을 탕감받은 종은, 길을 걷다가 자신에게 빚을 진 동료를 만나게 됩니다. 자신이 임금에게 지었던 빚보다, 그 동료가 자신에게 지은 빚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지만, 인색하게도 임금의 종은 그 빚을 모두 받아내려 하고 있지요. 그 모습을 알게 된 임금은, 그 종에게도 철저하게 셈을 하여 탕감해주었던 빚을 전부 갚게 합니다. 

 

비유에서 말하는 용서


  비유 속 임금님은 하느님, 그의 종은 우리 자신, 그리고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동료는 우리의 이웃일 겁니다. 하지만 비유를 읽다 보면, "나는 그 종처럼 빚을 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됩니다. 마치 빚을 탕감받았던 종이, 애초에 자신에게는 빚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 것처럼 말이지요. 사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우리가 더 큰 잘못을 했으니, 적은 잘못을 한 상대를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임금의 종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는 길과, 동료가 진 빚을 톡톡히 받아내는 것이었지요. 만약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면, 자신이 탕감해준 그 재산보다 훨씬 큰 빚을 탕감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료에게 빚을 다 받아낸 종은, 그렇게 받아낸 재산이 쓸모가 없을 정도로, 그 가 원래 치루어야 할 더 큰 값을 치르게 되었지요.

 

 이 비유를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현명한 선택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당장에 큰 득도되지 않는 무언가를, 동료에게서 받아내는 것보다, 그것을 탕감해주고 나중에 하느님께 그 몫을 받는 선택이 훨씬 현명할 수도 있음을 말이지요.

 

나를 위한 용서


  용서에는 상대를 위한 마음보다, 자신을 위한 마음이 더 많이 담겨있습니다. 나의 괴로움을 덜고, 하늘나라에 있는 나의 재산을 더 키우는 방법이 바로 용서이기 때문이지요. 나를 위한 용서는 수백 번이고 기꺼이 할 수 있지만, 남을 위한 용서는 한 번을 하더라도 굉장히 힘이 듭니다. 용서가 진정으로 나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면, 적절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행동이 그렇듯,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행동은 좀처럼 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위한 점은 없고, 오로지 남만을 위한 행동 또한,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어떠한 행동이 우리에게 엄청난 이익으로 인식된다면,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는 그 행동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해야 하는 의무감을 심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통해, 우리가 진실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알려주시며, 자발적인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야를 가르쳐주고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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