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믿음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은 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심지어 이 여인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도, 하느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지요. 복음 전문을 읽으며,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커다란 믿음이 무엇일지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마귀가 들린 딸
오늘 복음에서는 마귀가 들린 딸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마귀가 호되게 들렸다는 것이 정확히 어떠한 증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인 상황일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해결할 수도 없는 고통 속에서 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인 여인 또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 괴로움이 지속될수록 두려움이 커지고, 두려움은 좌절감이 되어서, 모녀의 삶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었을 테지요. 이러한 여인에게는 희망을 걸 수 있는 무언가가 정말로 간절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다
그때 치유의 기적들로 소문이 자자했던 예수님이 여인의 고을을 지나가게 됩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을 지나치지는 않을까 큰 소리로 절규하며, 그분의 도움을 청하지요. 그녀의 절규에는 여태까지 겪었던 수많은 사연들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계속해서 울부짖는 그녀를, 제자들은 떼어놓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을 잃은 양들을 위해 파견되었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예수님의 앞에서 절을 하며, 자신의 청을 알립니다. 예수님은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줄 수는 없다는 대답으로 그녀의 청을 다시 한번 무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강아지도 땅에 떨어진 부스러기는 먹는다면서, 또다시 간절히 예수님께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녀의 커다란 믿음에 감탄하며, 곧바로 그녀의 청을 이루어줍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가 의아할 정도로 그 여인의 청을 차갑게 거절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녀의 믿음이 크다는 것을 확인하시고, 곧바로 그녀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의 커다란 믿음을 증거 한 것이었을까요?
여인의 괴로웠던 삶
호되게 마귀가 들린 딸을 두었던 복음 속 여인의 입장을 상상해봅니다. 아마도 딸이 단순한 질병으로 아파하고 있었다면, 그 여인은 자신이 간호를 해주거나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방법을 시도하기 마련이니까요.
자신이 살면서 보고 들었던 수많은 방법을 시도해보아도, 딸아이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딸의 문제가 커다란 벽이 되는 순간도 찾아왔을 테지요. 여인은 이러한 벽 앞에서 오랜 시간 괴로워하기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힘들어하는 딸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뿐이었습니다.
해결해 줄 수도 있는 존재
그러다가 예수님의 존재를 어느 날 듣게 되었고, 또 그분이 자신의 고을을 지나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고을을 지나기 전까지만 해도, 여인은 예수님이 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강력히 믿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였다면, 예수님이 자신의 고을을 지나갈 때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직접 찾아가는 선택을 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여인은 어쩌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예수님이 해결해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간절함이 믿음으로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고을을 우연히 지나가던 예수님을 붙잡고 자신과 딸아이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습니다. 이 울부짖음이 처음부터 강력한 믿음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인 주님'이라고 예수님을 칭하였지만, 주님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동안의 괴로움과 억울함, 그리고 희망을 향하여 나아가고 싶은 간절함 등이, 한데 어우러져 커다란 외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과는 어떠한 관계인지를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울부짖을 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온전한 치유가 될 수 없음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선물을 주고받을 때는, 서로의 관계를 확인합니다. 아무리 큰 선물을 받아도 누가 그 선물을 주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대상에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어떠한 관계에서든지 교류, 또는 사랑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목자를 알아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다는 말씀은 많을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하지요. 길을 잃은 양은 애초에 자신의 목자가 누군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를 만났을 때, 다시 그 길 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목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양에게는, 목자의 어떠한 노력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그 여인을 이스라엘 집안이 아닌 사람, 즉 목자를 알아볼 수 없는 사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예수님을 남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으로만 바라보았었지요. 게다가 예수님은 그녀를, 자녀가 아닌 강아지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님"이라 고백하며, 또다시 자신의 청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더욱 어려웠던 그녀의 믿음
이스라엘 집안은 과거의 수많은 일들과 기록들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다지고, 또 전해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듣고 익히며, 계속해서 그분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왔지요. 이방인이었던 그 여인에게는 이러한 배경과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와 구세주라는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그녀의 삶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자신이 울부짖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대상이 자신의 주인임을, 그리고 자신을 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임을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마치, 그녀의 괴로웠던 과거가 응축되어 연료가 되고, 믿음이라는 불씨를 커다란 불꽃으로 짧은 시간 폭발시킨 것처럼 말이지요.
참으로 큰 믿음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굉장히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물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조차 하느님의 이끄심의 영역에 있음을 믿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커다란 믿음은, 참으로 큰 믿음은, 예수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거창한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연히 자신의 삶에서 지나가는 예수님을 느꼈을 때, 자신의 경험과 기억들을 재료 삼아서 그분이 나의 주님이며, 구세주임을 알아차리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커다란 믿음이며,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주시는 참된 구원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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