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가장 작은 사람과 가장 큰 사람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9. 2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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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도심 속 건물들

가장 작은 사람과 가장 큰 사람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가장 작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을 의미하며,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크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뜻하는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사람인지를 두고 서로 다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제자들 사이에서는 그들 중 누가 가장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깨닫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큰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유치하고 단순하게 보일지라도, 다투는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커다란 삶의 목표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우월성을 돋보이려 하는 모습과,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모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일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크기"는 "존재감"과 직결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집을 키우고, 명성을 키우며, 능력과 지식을 키우는 것 역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며, "존재감"이 큰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존재감과 인정 욕구


  이처럼 사람들의 인정 욕구는 자신의 "존재감"과 연결됩니다. 흔히 '자존감'이라고 표현되는 어떠한 '자의식'이 강할수록,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줄어든다는 점을 살펴보더라도, 인정 욕구는 스스로의 '존재감'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감"이라는 단어를 풀어서 해석해본다면,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라고 표현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존재함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존재감을 느끼는 것은, 그 대상이 "있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커다란 크기의 사물은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기에, 그 존재가 "있음"을 쉽게 자각할 수 있지요. 도심 속 수많은 빌딩의 존재를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중 가장 높은 건물의 위치나 이름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크기만 크다고 그 대상의 존재감이 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과 상관없는 커다란 건물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편안한 집이 더 큰 존재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


  이러한 관점에서 존재감을 바라본다면, 존재감의 크고 작음은, 물리적인 크기에 있다기보다, 우리가 그 대상에 부여하는 의미와 직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대상이라도, 그 대상에 대한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존재감에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보통 어떠한 대상을 향해, 두려움, 즐거움, 혐오 등을 느낄 때, 그 존재감을 더 크게 받아들입니다. 

 

 존재감은 그 대상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그 대상에서 찾은 의미를 통해 커져갑니다. 어린아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도 "의미" 즉,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한, 혹은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존재는 "하느님"이십니다. 만물의 존재는 "하느님"을 가리킨다는 말을 통해, 우리는 존재감에 관한 특별한 해석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다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다투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조금은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린아이를 가리키며,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존재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대상에서 "하느님"을 느끼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함"을 나누어주며 수많은 생명을 창조하셨고, 우리는 생명들의 존재감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추적해나가는 것이지요. 마치 퍼즐 조각들을 끼워 맞추며,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켜가듯 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존재감을 가장 진하고 깊게 느낄 수 있는 상태는, 그 대상을 사랑할 때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존재감은 세상의 전부인 것만큼 커지게 되니 말입니다. 사실 사랑은, 그 대상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합니다. 

 

존재를 막지 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던 사람을 막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존재감"에 대한 진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모든 존재들의 "존재"가이 우리들의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짚어주고 있습니다.

 

 '너희를 반대하는 자' 즉, 너희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 바꾸어 말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생명의 길"을 거스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의 "존재함을 막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그 어떠한 대상의 존재를 허락하거나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우리의 존재 역시, 하느님을 제외한 그 누구에 의해서도 막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존재의 의미를 알다


  인정 욕구는 우리의 존재에 권한이 없는 대상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갈구하는 "평생 동안 채워지지 않을 욕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존재의 여부는 오직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존재가 커보아야 하고, 높아 보여 야한다는 강박과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가장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존재를 "인정"해주셨고 받아들여주셨기에,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길을 거슬러,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방향을 선택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존재를 하느님께서 부정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를 계속해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존재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바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 가운데에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은, "존재에 대한 진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서 나의 존재를 허락해주셨음에서 찾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키우려고도 깎아내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는 것에서 찾지 않는 사람은, 가장 작아 보일지언정 진실을 알고 있는 가장 큰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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