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근심과 고통을 내던지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9. 2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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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
숲 속을 걷는 어린 아이

근심과 고통


 오늘 독서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버려라." 근심과 고통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이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근심을 떨쳐버리고, 고통을 흘려보낼 수 있는지 독서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독서 전문
독서 전문

젊은 시절을 기쁘고 즐겁게


 독서에서 코헬렛은 젊은 시절이 주는 특별함과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기쁨을 만끽하며 즐겁게 보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선택한 모든 일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주의와 함께 말이지요.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분명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여정이 기쁘거나 즐겁지 않다면, 자신의 선택이 온전하지 않았거나,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과를 마주했을 때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근심과 고통을 느낍니다. 반대로 자신의 뜻대로 많은 것이 이루어져 갈 때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요.

 

우리의 젊은 시절


  어쩌면 코헬렛이 이야기한 "젊은 시절"은, 단순히 '어린 시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음"은 '죽음'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생각하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직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다고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지만, 죽음에 대한 우려를 크게 하지 않는다면, 분명 "젊은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코헬렛은 젊음을 찬양하는가 싶더니, 또 젊음과 청춘은 허무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젊은 시절이 지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우려하는 날이 금방 찾아옴을 알림과 동시에, 젊은 시절을 지나 죽음을 신경 쓰는 시절이 되면, 자신의 상태를 한탄하면서 근심과 고통에 갇혀버리게 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


  코헬렛은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모습이 자연스럽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각각의 시절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있음을 강조하고도 있지요. 죽음을 우려하는 시절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젊은 시절 삶에서 겪었던 일들 속에서 함께해주신 하느님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던 길을 걸었던 순간들을 기억하고, 그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떠올려야 합니다. 젊은 시절의 시행착오는, 죽음을 염두하는 시절에는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죽음은 '하느님께 되돌아감'을 의미합니다. 모든 여정이 그러하듯, 자신이 향하는 곳을 알지 못하면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여정에서, 하느님을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죽음 이후에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또다시 근심과 고통에 사로잡혀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의 모든 선택에 있어,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우리가 선택했던 그 길들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헛된 것, 즉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쫓아, 그곳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으려 했던 누군가가, 자신의 선택의 끝에는 죽음과 공허함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허무함을 느낄 것입니다.

 

 다시한번 강조하자면, 근심과 고통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찾아옵니다. 우리의 무지와 오만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였을 경우, 결과는 우리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심판이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선택의 결과가 우리의 희망사항과 달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근심과 고통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어쩌면 지옥은, 단순히 나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무시무시한 감옥이라기보다, 영원하고 진정한 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자들이, 더 이상 선택의 기회가 없음을 알게 되어 근심과 고통에 사로잡힌 상태를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우리는 기도문에서,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문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시야과 기호에만 근거하여 결정한 선택에는 항상 한계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것만 해결되기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기도와 마음은, 우리의 근심과 고통을 덜어낼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르지요.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택'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선택'이라는 권한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스스로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 힘을 대신 행사할 수 없지요. 다만 다른 이들은 우리를 속이고 구슬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과 다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기만 할 뿐입니다. 이처럼 강력한 능력인 "선택"에는 "책임"이라는 의무가 뒤따릅니다. 심판은 누군가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이며, 자신의 선택이 생명이 아닌 죽음을 초래했을 경우, 그에 대한 대가도 스스로 감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받는 "선택"이라는 선물을, 다시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받은 것을 되돌려드리는 차원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순종'하는 선택을 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찾아옵니다.

 

시행착오 끝에 순종을 택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젊은 시절 선택이 항상 옳았고, 또 그 끝에 항상 생명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일에서도 아쉬움이 남고, 또 후회를 하게 된 경험이 있을 테지요. 하느님께 의탁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은, 평생을 하느님의 노예로 살겠다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종'과 '순종'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우리를 맡기는 선택은, 하느님의 시야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뜻과 하느님의 뜻의 방향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그것을 조율해나가는 과정이 매우 험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틀어진 자세와 신체를 교정하듯, 순종을 선택할수록 점차 자신의 뜻과 하느님의 뜻의 격차는 줄어들게 됩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는 존재


  하느님은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게 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실제로 자신의 뜻에 맞게 흘러가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여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은 항상 영원하고 진정한 "생명"에 그 뜻을 두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뜻대로 모든 일이 나아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내 뜻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전자의 상황은 바라지 않을 테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곁이자 우리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아보지 못한 사람은 해가 지고 집에 들어가야 할 때 많은 아쉬움이 남을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마음껏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선택해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마음껏 체험해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이 완전해질 수 있으며, 근심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 곁에 머무는 것임을, 해가지고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알아차릴 수 있도록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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