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하느님은 왜 우리를 도우시는가?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9. 27.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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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눈보라 속을 걷는 사람

하느님의 도우심


오늘 독서에서는 이러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던 하느님의 도움이, 사실은 정말 의아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지요. 독서 전문을 읽으며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해여 묵상해봅니다.

독서 전문

독서 전문
독서 전문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다


독서에 등장하는 욥이라는 사람에게는 말도 못 할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펼쳐집니다. 자신의 재산을 잃고, 가족도 잃으며, 자신의 명성과 신념마저 모두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지요. 괴롭고 힘든 일들의 연속으로 인해, 욥의 삶은 너무나도 처참하게 망가졌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있자, 결국 욥의 입에서는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삶에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마주할 때,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독서에 등장한 욥의 사례처럼, 수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목숨마저 신이 거두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신의 탄생과 삶을 저주하면서 까지 말입니다.

살고 싶다는 간절함


  하지만 자신의 목숨마저 가져가라는 절규와, 스스로의 탄생을 저주하는 마음의 바닥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아닌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놓여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인생에 큰 이변이 없었더라면,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기에,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것만 같은 하느님을 더욱더 원망하게 됩니다. 어쩌면 자신의 탄생을 저주한다는 말은, 자신을 창조한 하느님을 향한 분노와 저주였을지도 모르지요.

수많은 의문들


  여기서 욥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질문을 외치기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하느님은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이러한 외침에 잠재되어 있던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처음부터 고생과 고통을 모르도록, 평화와 안정 속에서 우리를 영원히 지켜주시면 안 되는 것일까?", "왜 하필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간 후에야, 괴로움에 지쳐 숨이 헐떡거리고 나가떨어진 후에야, 왜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것일까?"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은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그리고 그 길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기에 하느님이 허용한 것일 것이라며, 스스로를 납득시켜봅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괴롭고 힘든 일 앞에서는 머릿속 생각과 마음속 외침이 둘로 갈라지게 될 때가 많습니다.

주어진 상황들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들이나 하느님의 계획은, 하느님의 즐거움을 위한 것도 아니며, 우리의 고통 자체를 위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독서에 등장한 욥은, 그러한 불행들을 감수해야 할 만큼 삐뚤어진 삶을 산 인물도 아니었지요. 예수님의 삶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이 겪은 환난과 고통 역시, 그의 잘못으로 겪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괴로움과 고통, 불행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왜 자꾸만 등장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의 괴로움과 고통, 즉 "불행한 상황"들은 하느님이 준 것도, 우리가 자초한 것도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는 우리가, 삶의 변화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일들을 "불행"이라고 낙인찍어버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다


  욥은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했던 수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한 상실들은 괴로움과 불행으로 이어지게 되었지요. 그러한 상실들이 불행이 되어버린 것은, 그 상실들을 "영원한 사라짐", 즉 "영원한 죽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믿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상황 자체가, 나에게 영원한 불행이 되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은, 스스로에게 영원한 행복과 생명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에서 비롯되지요. 차라리 죽음이 더 낫겠다는 상상을 하는 이유도, 자신의 아픔과 괴로움이 시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기에 그러한 것일 것입니다.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


  누군가가 자신이 마주한 상황으로 스스로가 영원히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영원한 생명과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것은 상실과 되찾음의 반복을 선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등산을 하면서 오르막길만 걸을 수도, 내리막길만 걸을 수도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등산을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오르막길은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내리막길만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등산을 포기하게 될 테지요.

오르막길이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어렵고 힘든 상황이 기쁘고 즐거울 만큼 유쾌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실을 통해서도, 어려운 상황을 통해서도 분명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진리와 깨달음이 있습니다. 오르막길 자체만 본다면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지만, 정상에 오른 후 하산을 하고 난 다음 우리에게 더 큰 뿌듯함과 보람을 주는 곳은, 바로 그 오르막길을 잘 걸어온 우리들의 모습에서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은 오르막길을 오르는 우리의 여정에서 섣불리 개입하시지 않으십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를 도와준답시고 계속해서 보행기에만 의존하게 만든다면, 아이가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일 테니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오르막길을 걸어내고 난 후, 결국 그 끝에서도 스스로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행복"을 창조해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영원한 생명'을 지니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삶이 항상 행복할 수 있으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빛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렵고 힘든 상황이 지나면 결국은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바탕되어야 할 테지요.

하느님은 우리를 항상 도와주십니다. 하지만 당장의 도움보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의 근원을 알아차리는 것을 더 우선시하십니다. 행복의 근원은 하느님이며, 하느님께 두어야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자신이 지녔던 것들을 행복의 근원으로 삼았다면,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앙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박으며 저주했을 때, 예수님은 분노와 괴로움에 못 이겨 그 사람들을 함께 저주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면서도, 인생의 오르막길을 오르면서도, 불행해지지 않았습니다. 힘들었지만 괴로워하지 않으셨고, 어려웠지만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산의 정산까지 등산을 마치고 하산하였을 때, 기쁨과 안식을 마주한 사람의 고백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이 다할 때까지, 세상 속에서의 우리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달려 나가 봅시다. 지금 마주한 괴로운 장면에서 우리의 삶이라는 영화를 멈춘다면 그 영화는 악몽으로 기억되겠지만, 이 장면을 지나 계속해서 삶을 이어간다면, 힘들었던 이 장면은 파란만장하고도 멋진 영화의 한 장면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하고도 영원한 행복을 알려주기 위해, 하느님은 오늘도 쓰러진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하느님이 온몸이 망가지고 영혼이 지친 이들을 살려주시는 것은, 그 여정 끝에서 결국은 웃을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주어진 자신의 여정을 온전히 마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여정을 무사히, 그리고 훌륭히 살아온 스스로에게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넘어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며, 오늘도 한 걸음씩 나아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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