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기 위한 일
세상에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싫어하는 유형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위선자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보여주기 식"의 행동들을 불쾌해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이러한 행동들을 주의하라고 일러줍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보여주기 위한 의로움을 행한 적은 없었는지, 그리고 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좋지 않은 행동인지를 생각해봅니다.
복음 전문
위선
위선이라 함은, 실제로는 선한 마음이 없으나, 그 행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취하는 일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위선의 행동을 '스스로 나팔을 부는 행위'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위선은 왜 좋지 못한 행동일까요?
속이는 것
우리는 흔히,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실제 목적을 다른 것으로 포장할 때, 누군가를 속인다고 표현합니다. 위선에 있어서 가장 큰 목적은 '선'이 아닙니다. 선행을 통해 얻게 되는 '자기만족'과 '과시'가 그 주된 목적이지요. 만일 누군가가 선행을 하면서, "저는 의로운 마음이 없지만, 인기를 위해서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표현한다면, 누가 그를 위선자라고 부르겠습니까. 위선이 더욱 위험해지는 순간은, 자신마저 속이게 될 때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원인과 동기를, 자신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보이는 것이 가져다주는 결과물에만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른 손이 모르게
왼손과 오른손이 이렇게나 가까이 붙어있는데, 어떻게 다른 손이 한 일을 모르게 할 수 있을까요? 인위적으로 숨기라는 말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의로운 일과 선행을 할 때, 그로 인한 대접을 갈망하면서 요란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자연스러움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두 손을 쓰는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행동을 할 때를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어, 편안하게 밥을 먹는 상황을 떠올려봅시다. 식사 중 왼손이 무엇을 하고 있고,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 인위적으로 의식하면서 움직였나요? 아니면, 조금 전 왼손과 오른손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리기도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나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때
반면에, 자신이 식사하는 과정이 전 세계에 방송이 되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모든 사람들이 식사 과정을 관람하고 있다고 가정해보는 것이죠. 그것을 인지한 순간, 모든 행위는 부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수도 있고, 자신의 모든 행동이 식사라는 본연의 목적과 달리, 예뻐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연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왜 숨기라고 하시나
하지만 복음에서는 '자선을 숨겨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연스러운 상태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고 있기에 제시해주는 하나의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식사 장면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식사가 아닌 연기를 하게 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를 강조한다고 자연스러운 식사가 가능해질까요? 편안한 식사는 자신의 음식을 들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입니다.
극약처방
이미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서, 벼랑 끝으로 달려가고 있는 자동차는, 핸들을 중앙으로 맞추는 것이 아닌, 벼랑의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방법으로 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숨겨라"라는 처방은 "드러내고자" 했던 본연의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주는, 극약처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다시, 그 본연의 의미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죠.
숨어계신 아버지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숨어계신 아버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방향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훌륭한 아버지를 닮고 싶어 하는 아들의 마음처럼 말이죠. 그러다 문득 이러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신이 드러내는 아버지라면
신이 무언가를 이루어 준 다음에 "야 그거 내가 해준 거야."라고 매번 말한다면 어떨까요? 그 일이 아무리 위대하고 어려운 일이라 해도, 무언가 찝찝함과 거부감이 남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이 직접 드러내지 않아도, "당신이 해주셨군요"라며 그분의 도우심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라도, 일평생 계속해서 생색낸다면 정이 뚝 떨어질 것입니다. 나의 생명을 구해준 것이, 전적으로 무언가를 바란 행동이었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장난감
이처럼 신도 인간을 창조하고 이끌어준 것이, 무언가를 바란 행동이었다면 인간은 단지 신의 장난감에 불과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자신의 쾌감을 위해서가 아닌, 사랑으로 인간을 대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길러준 부모님
만약 우리를 길러준 부모님이, 우리에게 들어간 비용과 노고들을 모두 서류로 기록하여 청구한다면, 그 안에 사랑이 느껴질까요? 만약 부모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들이 진정 바랬던 것은 자녀에 대한 투자가 아닌 사랑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은 드러내지 않는다
사랑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숨겨라"가 아니라 "드러내지 마라"입니다.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면, 그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득 누군가가 이야기한 말이 하나 떠오르네요. "사랑은 주고 주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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