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무엇을 위해 단식하는가? (슬퍼하는 이유)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3. 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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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잔치
혼인 잔치

혼인 잔치의 손님들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은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며, 그때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뒤이어 등장합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어떠한 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인지, 복음 전문을 살펴보며 생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단식을 하는 것

 복음 초반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단식을 많이 한다고 자랑하듯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나무라듯이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길 때, 단식을 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단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단식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구약에서는 단식을 속죄의 의미로 행하였지만, 신약에서는 슬픔의 표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 자연스럽게 입맛이 떨어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단식은 인위적인 행동이라기보다,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인위적인 단식

 구약에서도 본연의 의미가 퇴색된 인위적인 단식을 비판합니다. 단식을 수덕의 행위로만 생각하며, 단식을 하는 행위 자체를 자랑하고 강요하는 분위기를 비판한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예수님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슬퍼할 때와 기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기뻐본 적이 없는 사람은, 슬픔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것이며, 단 한 번도 슬퍼한 적이 없는 사람은, 기쁨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신랑과 함께할 때

 마찬가지로, 혼인잔치에서 신랑과 함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신랑이 사라져도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슬퍼할 수도 없습니다. 신랑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한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신랑이 사라졌을 때, 상실감을 느낄 수 있겠지요. 그제야 신랑과 함께했던 시간이 즐거웠고 소중했음을 깨닫기에, 다시 신랑과 만날 날을 고대하게 됩니다.

빼앗길 날

 신랑이 사라지게 되면 그의 빈자리를 알게 되는 듯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이 어리 석어 보일 수도 있지만, 소를 잃었을 때 소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을 위한 단식인가

 문득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우리는 단식을 하면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무엇을 바라고 있기에, 이토록 애가 타고 있는가. 심지어 단식이 아닌 다이어트도, 날씬하거나 건강한 몸매를 원하기에 시작된다. 자신이 어떠한 몸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다이어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한 굶주림이 되지 않도록

 단식은 무작정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성을 지니고 행하는 행위입니다. 단식을 통해 기리는 것이 없고, 단식을 행하는 모습으로 무언가를 얻기만 바란다면, 그것은 퍼포먼스에 불과할 것입니다. 또한 기다림이 없는 단식은 단순한 굶주림에 불과합니다.

슬픔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갈망하며 느끼는 슬픔은 기쁨을 느낄 순간이 언제인지를 뚜렷하게 알려줍니다. 하지만 막연한 슬픔은, 기쁨이 찾아왔을 때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의 눈에 흐르는 눈물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눈물이 멈추는 날이 언제 오는지도 알지 못한 채 괴롭기만 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