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시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9. 21.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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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오늘 독서 말씀에서는 이러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찾아 헤맬 때가 많습니다.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신다는 뜻은 무엇일지, 독서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독서 전문

독서 전문
독서 전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도 바오로는 사람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며 권고합니다. 그리고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를 사랑으로 참아주라는 이야기도 하지요.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 "평화의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이러한 바오로 사도의 말을 정리해보면, 부르심으로 인하여 이어지게 된 무언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부르심은 무엇이며,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평화의 일치는 무엇일까요? 부르심과 일치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르심의 주체와 일치의 대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단체나, 어떠한 집단, 혹은 개인이 부르심의 주체와 일치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타인에 의해 끌려만 다니며 괴로움을 느끼는 잘못된 길을 걸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희망을 느끼다


우리의 부르심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의 일치의 대상 또한 하느님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거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하느님의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조금은 특별한 섬세함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차리는 하나의 방법으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희망은, 욕심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막연한 기대, 무지함 바탕으로 하는 무모함과는 구분됩니다. 희망은 거짓된 두려움을 없애고 진실의 방향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빛과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속 희망은, 절망과 괴로움, 그리고 두려움에 빠져있던 우리가 다시 용기를 얻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부르심과 일치


우리는 부르심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치하려고 다가가는 대상이 하느님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하느님도 한 분뿐이시라는 말씀은, 부르심의 주체와 일치의 대상이 하나이신 하느님뿐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하나가 아닙니다. '만물'이라고 표현할 만큼 다양한 대상들이 세상에 펼쳐져 있으며, 내면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정과, 머릿속의 수많은 생각 역시, 하나라고 받아들이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의문점을 알기라도 한 듯, 사도 바오로는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를 떠올려봅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거나,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일들을 통해 그 대상을 떠올립니다. 길을 가다가 마주친 누군가의 모습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힘든 일을 겪을 때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견디도 하고, 무서움과 두려움이 찾아올 때는 어딘가에 있을 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만물 역시, 하느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물이 가리키는 곳을 향하여 올라가다 보면, 그 "위에" 하느님이 계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겪는 수많은 일들은, 우리에게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떠올립니다. 그러한 감정은 신에 대한 감사, 또는 원망으로 이어지지요. 만물을 "통하여" 느끼는 우리의 감정 역시, 결국은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만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


그렇다면 만물 "안에"는 하느님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의 계심" 즉, 하느님의 존재를 물질적으로만 국한되어 생각할 때 오류가 발생합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입자의 형태로 만물에 녹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난 소중한 사람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남아있다는 말 역시, 입자의 형태로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자신의 모습을 "나누어줌"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은 물질적인 형태가 아닌, "생명"의 형태로 우리에게 나누어졌지요.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우리가 부여받은 생명을 살아내는 것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오로가 강조한 "저마다의 역할"이지요.

저마다의 역할


  사람을 포함한 만물에는 저마다의 역할과 이유가 있습니다. 역할과 이유가 있다는 것은, 생명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의 역할을 의미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나열한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나 교사는 직업적인 역할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이어나가는 과정, 즉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우리가 품고 살아가며 실현시켜야 할 하느님의 일부분을 짚어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나누어진 그리스도의 은혜와 은총은, 하느님의 생명이자,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말씀과 생명의 형태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 말씀과 생명을 우리의 삶에서 표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것을 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의 필름이 이어져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듯, 우리가 담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한 장 한 장이 이어진다면, 우리가 그토록 만나고 보고 싶어 하던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하느님께 물려받은 하느님의 모습 한 장을 품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각자의 삶에서 충실하게 그려내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일 겁니다. 그 그림을 그려낸 사람이야 말로, 독서에서 표현된 '성숙한 사람'일 것이며, 성숙한 사람들의 그림이 하나 되는 순간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 즉, 하느님의 완전한 존재를 그려낸 찬란한 작품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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