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모든 일에는 시기와 때가 있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9. 2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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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
꽃밭

모든 것과 모든 일의 시기와 때


 오늘 독서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모든 것의 시기와 때가 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그 시기와 때는 무엇을 위한 시기와 때일지, 독서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독서 전문

독서 전문
독서 전문

정해진 시기와 때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기와 때가 있음을 드러내 주는 독서 말씀 속 다양한 사례들은, 우리가 '정해진 시기와 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는 이야기는 그러한 시기와 때를, 우리가 임의로 정할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시기와 때가 정해져 있다는 표현은, 단순히 우리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적절한 시기와 때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적절함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각자가 좋다고 여기는 순간으로 쉽고 빠르게만 도달하려 합니다. '돈이 많은 상태', '체력이 좋은 상태', '지식이 풍부해진 상태', '명예를 얻은 상태'처럼 자신이 바라던 무언가가 풍족해지는 시기와 때를 향해서 말이지요. 

 

수확의 시기와 때


 자신이 바라던 시기와 때에 도달했을 때, 그 순간 많은 것들을 거둘 수 있으려면, 수확의 적절한 시기와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수확의 순간만을 바라보며, 그간의 과정을 무시한 채 천천히 자라나는 작물만 바라보고 있다면, 그 기간은 답답함과 괴로움의 시간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라나는 작물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빨리 뽑아버리는 경우도 발생할 테지요.

 

 모든 것과 모든 일의 시기와 때를 사람이 임의로 정하려는 순간, 많은 것들이 망가지며 혼란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면서, 우리는 그 작물을 몇 월 며칠 몇 시에 수확할 것이라는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습니다. 작물이 자라나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가 수확의 시기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 시기는 사람이 임의로 정할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할 것입니다.

 

누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그렇다면 정해진 시기와 때는 누가 정하는 것이며, 또 무엇을 위해 정해진 것일까요? 피부에 종기가 생긴 상황을 떠올려봅니다. 종기가 아직 충분히 곪지 않아서 부어있는 경우에는 원만한 치료를 위해, 조금 더 시간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치료의 시기를 놓쳐 종기가 신체에 큰 위협이 될 때에는, 그 상처를 도려내어야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러한 판단은, 적절한 치료방법을 알고 있는 의사의 몫이며, 모두 환자의 "생명"을 위한 처방이지요.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시기와 때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그때를 정하는 존재는, 유일하게 생명의 길을 알고 계신 하느님일 것이며, 모든 시기와 때는 우리의 진정한 "생명"을 위해 정해진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특정한 시기와 때만을 "생명" 또는 "행복"이라고 정해놓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살아있는"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특정한 시기와 때에 고정되어 머물러 있지 않지요.

 

정말로 살아 있는 것


 사람들은 꽃이 활짝 핀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였고, 그 시기와 때를 사시사철 유지하기 위하여 '조화'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조화에서는 생화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아름다움, 즉 "생명"을 찾을 수 없었지요. 어쩌면 꽃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꽃 자체의 화려함보다 꽃이 피어난 과정이 있었기에, 그리고 꽃이 피는 시기와 때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모습도 떠올려봅니다. 부모는 아이가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만, 계속해서 언제나 웃기만 하는 아이를 바라지 않습니다. 만약 모든 상황에서 웃기만 아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 아이를 "행복하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 아이에게는 웃음만큼이나 울음도 중요합니다. 아이의 울음은 자신이 상태를 알리는 표현 수단이며, 부모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만약 누군가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아이의 울음을 억지로 막는다거나, 울 때마다 간지럼을 태워 강제로 웃게 만든다면, 아이는 온전히 자라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상실은 나쁜가?


  우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슬픔, 상실, 죽음 역시 "생명"을 향한 길에서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독초가 약재로도 쓰이는 경우가 있듯이, 우리의 가려진 눈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상실'의 경험은 약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무언가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낄 때는, 그 대상을 소유할 때보다, 그 대상을 되찾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외면적으로, 혹은 내면적으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상황을 마주할 때면, 당장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세대가 바뀌든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그 일들 역시, 우리를 충분히 무르익게 해 줄 양분이 됩니다. 당장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이 우리를 아프고 힘들게 할지라도,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제때에 아름다웠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독서에서는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들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고생이 없는 "편안함"과 혼돈할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행복은 고생이 없는 것이 아닌, 괴로움이 없는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어려움이라도 고생은 보람을 데려오고, 괴로움은 불행을 몰고 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과 모든 일의 시기와 때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에서 무언가를 "절대적"이라고 판단할 때, 수많은 오류와 괴로움들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다"라는 말씀은 어쩌면, "절대적인 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뿐이다."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외의 무언가를 "절대적"인 것이라고 판단할 때, 우리의 괴로움은 싹트기 시작합니다.

 

 시기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해진 시기와 때는, 절대적으로 정해진 시간과 기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남들과 비교할 것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 시기와 때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알고 계신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지나온 시기와 때를 돌아보며, 그 속의 아름다움을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지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옛말은, 그렇게 그 시기와 때를 겪고 난 후, 아름다움을 알아챈 이들의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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