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피는 물보다 진하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9. 20.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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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잉크
물 속에 떨어진 붉은색 잉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이 말씀은 단번에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머니와 형제들은 어떠한 관계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어머니와 형제들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에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군중으로 인해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그들을 보고, 누군가가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에 예수님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는 다소 어려운 대답을 하십니다.

유교문화와 공동체 의식이 뿌리 깊게 내려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족"이 주는 의미가 상당히 큽니다. 우리는 그 가족의 근거를 흔히 "혈육"에 두고 있으며,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진짜 "가족"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혈육을 중요시 여기는 마음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러한 사고방식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직계가족들보다 남들을 더 챙기는 행위는 그리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혈육은 외면하고, 타인운 가족이라 칭하면서 우선시하는 모습 역시, 우리에게는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혈육을 중요시 여기는 마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평생을 남으로 알고 살아온 누군가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자신의 혈육임을 알게 된다면, 그를 향한 우리의 마음에는 분명, 큰 변화가 생깁니다. 혈육이라 함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피를 공유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혈육은 우리와 비슷한 유전자를 품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법적으로도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을 만큼 특별한 관계입니다.

혈육은 태어남과 동시에 살과 피, 즉 유전자를 함께 나눈 사람들이며, 함께 식사를 하며 살과 피가 될 양분을 나누던 관계이고, 미래의 자손들에게 비슷한 살과 피를 전달해줄 수 있는 한정된 불변의 존재들이기에, 우리의 삶에서 더욱 중요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가족이 소중한 이유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가족"이란 태어나면서 무언가를 함께 나누었고, 살아가면서도 그 무언가를 함께 나누며, 앞으로도 무언가를 나누어줄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가족이 나누는 그 "무언가"가 참되고 영원한 것일수록, 관계의 결속력과 소중함은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실제 가족들을 등지고,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이 되어 새로운 "가족"에만 충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양한 집단에서 "가족"을 빙자하며, 착취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경우를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실제 관계와는 다른,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관계를 내세우며 우리의 눈을 가리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었지요.

우리는 누군가를 가족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마음속 뿌리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주는 관계가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단순히 주거지를 공유하는 관계를 가족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며, 법적으로 귀속된 관계를 가족이라 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근거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가족의 관계와 그 안에서 느끼는 소중함 역시 한정된 것에 불과하겠지요.

피가 물보다 진한 이유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색깔이나 농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혈육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마도, 피와 연관된 '생명의 탄생'과 '가족의 만남'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피는 사람의 영역을 벗어나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에 특별합니다. 우리의 피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닌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그것을 끊어낼 수 있는 힘 또한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알기에, 혈육이라는 관계의 지속성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자신의 혈육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아마도 가족의 결속력과 소중함은 혈육, 즉 "피와 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려주시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물질이 진실을 가리다


예수님의 가족이 찾아왔으니, 그들을 우선적으로 만나야 되지 않겠냐는 누군가의 말에는, 예수님 앞에 모여든 사람들과 예수님의 혈육에 대한 구분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히 "피와 살"에 의한 물질적인 구분이었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게 만들었지요.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을 방문했던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장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수님이었지만, 동네 사람들과 친지들은 단순히 '목수의 아들'이 말하는 것으로만 바라보았지요. 이처럼 물질적인 눈으로만 상대를 바라보고 판단할 때, 우리는 진실을 마주하기 어려워집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


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는 것 역시, 무작정 십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따르는 물질적인 행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강연을 귀로 듣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편협적인 사고에 사로잡히지 않고,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넘기면서, 우리의 그릇을 확장해나가는 것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 피와 살에 근거하지 않듯이, 우리들의 하나 됨과 사랑의 나눔 역시 물질적인 것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생명과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누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비교가 아닌 진실의 여부


예수님은 혈육이 악하고, 신념을 함께하는 집단은 선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에 있어서 선과 악은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우리를 진정한 생명으로 이끌어주는지, 아니면 우리를 속이며 죽음의 길로 이끄는지에 따라 구분될 테니 말이지요.

예수님은 늘 우리의 생명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를 깨닫고, 그 근거를 올바른 곳에 두며 살아가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가족이 소중한 이유는 그들이 공유하는 유전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소중함이 유전자에 근거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부여하는 소중함의 근원을 제대로 바라보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인 하느님을 느끼고 알아가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을 통해 가능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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