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말씀에 권위가 있을 때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8. 30.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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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가르침

권위가 있는 말씀


 오늘 복음 말씀 구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토록 놀란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말씀에 권위가 있다는 표현은 어떠한 의미일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가르침에 몹시 놀라다


 오늘 복음에는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이라는 고을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던 예수님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가르침으로 인하여 몹시 놀랐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서 권위를 느꼈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가르침을 좋게 받아들이는 경우는, 바로 이러한 놀라움과, 권위가 함께할 때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봅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만 내세우면서, "원래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전하는 가르침에는 무게감마저 느껴지지도 않지요. 이는 사람의 경험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며, 그가 습득한 지식 또한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조이며 창시자


  우리는 흔히, '원조', 또는 '창시자'라는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는 합니다. 해당 분야에서 단순히 남들의 것을 따라한 사람보다, 무언가를 깊이 연구하고 직접 만들어낸 사람의 가르침을 더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의문이 듭니다. 사람이 정말 무언가의 '원조', 혹은 '창시자'가 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카파르나움에서 전했던 가르침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소개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랐다는 점과, 권위가 느껴졌다는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어떠한 방향의 가르침이 전해졌을지는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놀라움과 권위


  아마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들어보지 못한 선입견과 통념을 깨뜨리는 가르침을 전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순히 그 참신함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지요. 분명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이 들어보지 못했던 말씀이었지만, 듣는 순간 자신이 겪어왔던 모든 것들이 이해되는 그런 놀라운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와 늘 함께해주셨고, 지금도 함께해주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것은, 진짜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과,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가르침의 근거를 자신이 온전히 알고 있는 하느님에게 두었습니다. 사실 '권위'는 모든 것의 원조와 창시자인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침의 근거를, 자신이 세상에서 겼었던 경험과 세상의 지식에 두었다면 '권위'는 느껴지지 않았을 테지요.

 

마귀를 쫓아내다


  뒤이어 복음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알아본 마귀를 쫓아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의 앞에서 떠벌리던 마귀의 입을 막으며, 사람을 구속하고 있던 그 마귀를 쫓아내 버립니다. 사람들은 말씀만으로 마귀를 쫓아내 버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그분의 힘과 권위에 감탄합니다.

 

 이 장면에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사람들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자신의 존재를 미리 떠벌리던 마귀의 입을 막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장면은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진정한 가르침


 상대를 위한 진정한 가르침에는, 상대가 무언가를 스스로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입을 막았던 이유는, 아직 예수님과 하느님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무작정 예수님의 존재를 주입하여,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귀가 뺏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마귀라는 존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존재입니다. 당시 사람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세히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던 마귀이지만, 그 마귀는 예수님의 길을 걷지 않고, 악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마귀가 말한 공허한 외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온전히 우리에게 전해지는 과정의 걸림돌이었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치워버렸던 것입니다.

 

공허함을 벗어나기 위하여


  마귀의 공허한 외침을 되짚어봅니다. 마귀는 분명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가장 먼저 외친 말은, 당신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선을 긋는 말이었지요. 하느님의 존재를 '거룩함'으로만 받아들이다 보면,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으로도 받아들여야 그분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지요.

 

 머리로만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과,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다른 영역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머리로만 그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허함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함을 느끼지 못할 때 찾아오는 감정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로만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느끼며 예수님의 도우심과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느끼기 위해서는, 예수님, 즉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그분의 존재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시간들을 통해 예수님을 느껴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던지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라가다 보면,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였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항은 바로, 마귀가 마귀 들린 사람을 내동댕이치면서 나갔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던 장면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다양한 풍파를 겪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사람들 앞에서 내동댕이쳐지는 순간들도 찾아오지요.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우리의 영혼마저 해칠 수는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를 얽매고 있던, 우리를 괴롭게 하던 무언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떨어져 나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지만, 우리를 구속하던 그 무언가가 우리의 삶에서 떨어져 나가는 과정이 늘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그 순간, 당시의 불편함보다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자유의 기쁨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것을 떨어뜨리는 과정은 편안하지만은 않습니다. 새로운 변화는 늘 불편함과 어색함을 가져오기 때문이지요.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가 나갈 필요가 없었다면, 굳이 그 사람이 내동댕이쳐질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괴롭게 하는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발생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해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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