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병에서 풀려나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10. 24.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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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

병에서 풀려나다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 구절은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 혹은 얽매어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예수님께서 치유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자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병에서 풀려난 여인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있던 중, 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던 여인을 발견하십니다. 그 여인은 허리가 펴지지 않아 올곧게 서있을 수 없었으며, 심적으로도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그녀의 상태를 아셨기에, 그녀를 위한 치유를 더는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말씀은 오랫동안 자유롭지 못했던 그 여인을 해방시켜 줍니다.

 

 우리의 행복과 기쁨은 우리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자유는 침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만으로 우리가 느끼는 제약들에서 쉽게 빠져나오기는 어려울 때가 많지요. 병마에 시달리던 그 여인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회당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온전히 치유되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순간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이었습니다. 

 

움츠러들다


 오랫동안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파온 사람은 똑바로 설 수 없을 만큼 지치고 망가지게 됩니다. 오랫동안 굽어있던 허리가 펴지지 않은 것처럼, 계속해서 움츠러든 마음 역시, 우리의 바람대로 온전히 펴지지 않을 때가 생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움츠러드려고 할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떠올려야 합니다. 

 

 외부의 그 어떠한 것들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닌 자유와 생명의 근원을 기억하게 합니다. 하지만 "아픈" 상태가 되어,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마음을 움츠리고 있던 사람에게는 내적인 자유가 온전하게 지속되기 어렵게 되지요. 우리의 내적인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신 "숨", 즉 진정한 "생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 즉 생명은 하느님과 이어져 있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는 "아픈" 상태의 지속은 우리의 생명력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병마에 시달리다


  여인이 앓고 있던 병을 단순히 신체적인 "질병"이라 기록하지 않고, "병마"에 시달렸다고 기록한 데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여인이 앓고 있던 질병으로 인해 그녀는, 신체적인 제약은 물론 내적 자유에도 제약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하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그녀의 몸처럼, 그녀의 마음도 더 이상 하느님을 떠올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흔히 몸과 마음이 이어져있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먼저였는지, 즉 무엇이 우선된 것이며 우선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그 둘의 관계를 잘못 받아들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우리의 상황과 상태에 제약이 생기면, 우리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불행함으로 전환시킬지, 아니면 그 불편함을 재료로 하느님께 나아갈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지요. 

 

관계의 회복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내적인 것들을 해칠 수 없다는 이야기는, 하느님과의 관계, 즉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방해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는 이야기로도 받아들여집니다. 반대로 우리만 단절을 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 즉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음을 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를 치유해주시면서, 단순히 그들의 신체적인 제약만을 없애주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에 얽매어있던 그들의 마음을 치유해주시면서, 진정한 자유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할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십니다. 이는 분명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과정일 것입니다. 

 

 회개, 화해, 치유는 모두 "다시 좋았던 원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해주셨고, 우리의 존재를 유일하게 모두 알고 받아들여주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사실을 다시 기억해낸다면, 불필요한 곳에서 환상을 품고 두려움을 가지며 혼란에 빠지는 일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움츠러들다


  예수님을 적대하던 세력은, 이러한 치유의 과정을 모두 "일"로 보았습니다.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 안식일에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단순히 신의 "업무"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치유와 가르침은 누군가의 "업무"가 아닌,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생명력"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늘이 아닌 땅만 보면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허리는 굽어지고,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도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기도 하지요. 예수님은 한때,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못하던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일은 궁극적인 "생명"을 위한 여정이었을 것이며, 하느님의 여정은 "업무"나 "노동"이 아닌, 하느님의 존재 자체, 즉 생명과 사랑을 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땅이라는 결과물에만 집착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는 하늘을 보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치유를 통한 자유를 청해보아야 할 때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떠한 대가나 품삯이 있어야만 나아가는 여정을 우리는 "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여정이 품삯을 위한 노동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기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 치유를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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