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8. 1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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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낙타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불가능이란 없다며 스스로를 자극해보아도, 우리의 힘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부자는 하늘나라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 말씀을 언뜻 듣기에는, 예수님께서 마치 '부자'는 나쁜 사람이며, '가난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으시는 것처럼 보이도 합니다. 낙타가 바늘구명을 통과한다는 것은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다가오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이지요.

 

부자가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갑니다. 돈, 지식, 명예, 인기, 자녀복, 유머 등, 분야는 다르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영역에서 모두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부자'라는 단어에서는 왠지 모를 풍족함과 자유로움마저 느껴집니다. 자신이 바라는 만큼 무언가를 갖게 된다면,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불안은 모두 사라질 것만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에게,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지닌 것을 쌓아두며, 그곳에서만 행복과 평화를 얻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그 대상에 두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부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함께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지요. 실제로 뉴스에서는 자신이 지녔던 부를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식이 종종 들려오고는 합니다. 

 

부자는 나쁜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부자' 자체가 나쁘다고 말씀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그 대상에만 있다고 착각하는 '부자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짚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성경에는 '부자'로 살아갔지만, 잘못된 '부자의 생각'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던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수많은 자녀들을 거느리는 부자였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던 다윗은 시골 양치기에서 한나라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며,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지요. 이러한 성경 속 인물들의 생각은, 보통 부자들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브라함은 늘 자신의 가문이 풍성해지기를 꿈꿔왔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은 자손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가문의 '부'를 약속하시지요.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아들을 바쳐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아들은 자신의 '부'의 시작이 될 초석과도 같은 존재였지요. 많은 생각이 들었겠지만, 결국 아브라함은 자신이 꿈꿔왔고, 또 행복을 느꼈던 그 대상을 다시 내놓는 선택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부'가 우리 스스로를 망치는 상황을 바라시지 않으십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면서, 아이가 기뻐하기를 바라지만, 그 선물이 아이의 유일한 행복과 기쁨이 되어, 그것에 아이가 얽매이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풍요로움이 우리의 시야를 가려 하느님을 못 보게 만든다면, 그 '부'는 좋은 것이 될 수 없겠지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일깨워주고자 하시며, 무언가를 내려놓기를 요구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장면을 떠올리면, 우리는 보통 모든 것이 풍부한 '천국'이라는 공간에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러한 공간의 이동이 아닌,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 혹은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 속에서 풍요로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부자가, 자신에게 허락된 부를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다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 혹은 자신이 달려가고 있는 부를 보면서 하느님을 바라보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게임을 공부보다 더 좋아하는 아이가, 게임을 틀어놓고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것과 같은 상황일까요?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보통, 하느님보다 부를 더 소중히 여깁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법


 언젠가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며 자신을 찾아왔던 한 청년에게, 모든 것을 다 팔고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울상이 되어서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에게는 하느님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소중했으니까요. 하지만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죄고, 나누어주는 것이 선이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어떠한 대상에, 자신의 행복을 얽매어 놓는 것은 자신의 행복, 즉 자신의 생명을 그 대상과 함께 한정시켜 놓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행복과 생명을 사라지지 않을 하느님께 둔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행복,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제외한 그 어떤 대상도 절대적인 행복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시고 계시지요. 

 

내어놓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무언가를 버렸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것을 버려놓은 쓰레기통만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그 주변을 기웃거릴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곳을 서성이다가, 자신이 버렸던 그 대상을 다시 주워 마음에 품으며, 자신의 생명으로 안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버리고, 또 내어놓는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그 대상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을 내려놓는 것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향하여 있는 대상은, 곧 자신의 목숨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사람들은 더욱더 그 대상을 움켜쥐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목숨이 그곳에 없음을 알려주십니다. 또한 그것을 내어놓는다 하여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목숨을 내려놓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던 사람에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소 드러내 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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