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6. 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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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어머니
아이와 어머니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은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입니다. 살아있는 것의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독서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독서 전문

독서 전문
독서 전문

너 어디 있느냐?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하느님은,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혹은 죄로 인한 벌을 받기 두려워서, 하느님의 질문을 회피하고 숨어버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람을 처단하기 위해, 또는 면박을 주고 수치심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라는 선택으로 괴로움에 빠져버린 사람을 치유해주시고, 이끌어주시기 위해 부르시는 것이었지요.

하느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해, 그 근원을 찾아 질문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는지, 어떠한 마음이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하였는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남을 탓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게 하시고, 상대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갈망했던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우리가 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


아담은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 살라고 만들어주신 여자로 인해,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단순히 남을 핑계 대는 것을 넘어, 하느님의 일마저 잘못된 것으로 만들어 많은 것을 뒤틀어버립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이 주신 많은 것들을 불행의 근거로 삼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탓하고, 이웃을 탓하고, 가족을 탓하며, 심지어 자신의 모습까지 탓하기도 합니다. 불행의 원인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찾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허락해주신 그 모든 것들이, 불행의 씨앗인 것처럼 저주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진실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 주변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 투성이라며, 지금의 환경을 탓하지만, 사실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열매를 먹을지 선택할 수 있었던 에덴동산처럼, 지금의 우리도 어떤 열매를 우리 마음으로 받아들일지를 매 순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 하와가 불행의 근거가 되었던 순간은, 하와가 탄생했던 순간이 아닌, 스스로 그녀를 불행이라 판단하며 받아들인 그 시점부터였으니까요. 아마도 이러한 뒤틀린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이, '죽음'을 의미하는, 선악과를 먹은 결과일 수도 있겠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아담은 자신의 짝에게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는 뜻의 '하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전해집니다. 분명 아담은 하와에게 불만이 많았던 것처럼 보여집니다. 스스로의 죄를 하와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였으니 말입니다. 짐작컨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는 표현 안에는, 축복하는 마음보다는, 당신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분노가 담겨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너 때문에 이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었어."라는 의미가 담긴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여기서도 하느님의 신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분명 아담은 "당신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임을 하느님께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때문에"를 "당신으로 인하여"로 탈바꿈시켜 주십니다. 생명을 꺼트리는 분노와 원망을, 생명을 키우는 감사와 사랑으로 변모시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새로운 아담과 하와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우선시했던 아담과 하와의 선택과 달리,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한 예수와 마리아의 선택은, 우리 앞에 여전히 놓인 선악과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어쩌면 선악과를 따먹었던 하와도,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며 순명하였던 마리아도, 과거의 기록이 아닌, 매 순간 지금의 우리 앞에 놓인 두 개의 갈림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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