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오늘 복음 말씀 구절 속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걱정하고는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걱정을 내려놓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걱정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일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사도 요한으로 추측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미래를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아마도 그 질문 안에는 호기심, 걱정, 질투심 등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대답하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은 왜곡되어, 예수님이 사랑하는 그 제자는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라는 말로 해석되어 버립니다.
걱정의 시작
우리의 수많은 걱정은 크게, 두 가지로 시작되는 듯합니다. 먼저 자신의 길이 아닌 남의 길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며 선택하려 할 때 걱정이 생깁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길을 간섭하며, 그 사람의 선택에 과하게 개입하려고 할 때, 타인에 대한 걱정이 시작되는 듯합니다. 흔히, 미리 정해놓은 자녀들의 미래와 현실에서 차이가 생길 때, 가장 큰 걱정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바라보아야 할 것은, 타인의 길이 아닌 우리의 길입니다.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무관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시선이 스스로를 위해 마련된 길이 아닌, 타인의 길을 향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길 위를 걷고 있어도, 무엇이 우리의 길 위에 있는지를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각자의 길 위에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예수님이라는 목자를 놓쳐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서 걱정이 시작될 때도 있습니다. '이 길이 나의 길이 맞을까?' 하는 두려움, 또는 의구심에서 시작되는 걱정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특정 제자의 이름이 아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언급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늘 스스로와 비교하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지금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비교되는, 좀 더 나아보이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말입니다. 우리는 늘 그 이상향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괴로워하지만, 사실 그러한 모습은 지금의 내가 아니며,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환상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아마도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자신이 사랑받는 제자가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을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지금의 내 길이 아닌 무언가와 계속해서 비교하다보면, 내가 걷는 길에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내 길 위에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예수님이 나타나고 계신지를 바라보기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예수님을 소개하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제자도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심지어 자신을 팔아넘길 유다도 사랑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사랑과, 제자들이 판단하던 사랑의 기준이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인정의 상징으로 그분의 옆자리를 고집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옆자리를 두고, 자주 싸운 성경의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물리적으로만 생각해본다면, 예수님의 옆자리는 오른쪽과 왼쪽, 두 군데밖에 없을 테지요. 오늘 복음에 기록된 내용처럼, 만찬 때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질문을 던지던 제자는 한 명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아, 저 사람을 유독 사랑하시는구나.'라고 임의적으로 판단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품 안에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그 제자가 유일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에만 한정되어 예수님의 "옆자리"에만 집착하다 보면, 정작 늘 옆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차리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 맞는 계획과 이끄심을 준비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포옹이 큰 가르침이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따끔한 쓴소리가 더 큰 가르침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의 이끄심이 각자의 삶에 특화되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더 좋고, 어떤 것이 더 나쁜 게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을 통해,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는 가르침이 진정한 가르침임을 말이지요.
예수님의 제자 중 누군가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 중 누군가는, 순교를 통하여 예수님을 전하기도 하였지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온 한 인간이지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섬세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향과 본모습에 맞게, 예수님의 이끄심도 각자의 삶에서 각기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의 모습에 맞게 우리를 직접 이끌어주심을 믿는다면,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타인의 길에 대한 과한 관심과 개입도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 마태오복음 28장 2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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