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8. 2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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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
좁고 작은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힘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구원받을 사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던 예수님께 한 사람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요.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우리는 보통 어떠한 일을 앞두고, 그 일을 성공할 수 있는 확률에 집착할 때가 있습니다. 확률이 참고사항이 될 수는 있겠지만, 확률만을 어떠한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는 길을 걸어가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대하여 확률적인 시선을 갖고 있던 그 사람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에 있어서, 확률의 높고 낮음, 그리고 서로 간의 경쟁이 중요하지 않음을 알려주십니다. 구원은 "나에게" 일어나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진실로 바라는 것


 수술을 앞둔 환자를 떠올려봅니다. 환자는 수술에 성공할 확률이 굉장히 낮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수술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요. 환자는 살기 위해서 그 수술을 선택합니다. 환자는 수술에서 성공할 가능성보다, 자신의 생명이라는 빛 하나만 보고 수술에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던 그 사람은 "예수님 저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고 계셨다는 듯, 그 사람에게 그에 대한 대답 역시 들려주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표현은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좁은 문에 담긴 의미


 우선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말씀의 "실천"을 표현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와 예식을 드리지만, 말씀을 행하는 것에는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을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위해 공을 들이는 것으로만 생각할 때도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를 기억하고 행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은 받아들임과 행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상태가 변하고, 존재가 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러한 변화는 말씀의 받아들임과 실천으로 가능해집니다. 평생을 걷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일어나서 들것을 들고 걸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였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비유는 이를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어도, 불의를 일삼는다면 그들은 하느님을 아는 존재들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비유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 비유를 들면서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지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만큼 작아지거나, 바늘구멍이 낙타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지는 것이겠지요.

 

 구원의 확률을 따지던 사람의 마음에는, 문을 좁게 만든 하느님이 인색하다는 생각이 함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사람이 적냐는 물음에는, "그 좁아터진 문 좀 더 넓혀서 많은 이들을 구원하십시오!"라는 하느님에 대한 반감이 응축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을 더 크게 넓힐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최소한의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지요.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결국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 보면, 다리의 높이를 알리며 출입을 제한하는 구조물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높이가 제한된 그 구조물을 통과하지 못하는 차량은, 뒤에 있는 다리를 통과할 수 없음을 미리 알리는 역할을 하지요. 아무리 그 구조물의 높이를 높인다고 하여도, 그 차량은 다리 밑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의 인색함이 담겨 있는 구조물이 아닙니다. 그 문 뒤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행복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의 를 미리 알려주는 구조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낮아져야 한다'라는 말씀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낮아지고 작아져야 합니다.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우며 살아가기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말씀을 하시는지를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르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땅에서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행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서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행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욕구만을 내세우며, 하느님의 목소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높은 사람"은  그 좁은 문을 통과할 수도,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에 대답할 수도 없는 곳은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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