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숨을 불어넣어 살아나게 하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8. 1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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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눗방울
비눗방울을 부는 아이

숨을 불어넣어


 오늘 독서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숨을 불어넣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지, 독서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독서 전문

독서 전문
독서 전문

부활의 환시


  독서에 등장하는 에제키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합니다. 환시를 그대로 기록한 내용이기에, 그 모습을 전해 듣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장면들이 많이 묘사된 듯합니다. 하지만 에제키엘 예언자가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이, 하나의 비유를 담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꿈속에서는 수많은 뼈들이 등장합니다. 더 이상 살과 근육이 붙어있지 않은 뼈는, 말 그대로 죽음과 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은, 이 '죽음'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커다란 공포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부활, 죽음을 극복하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떨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돌파구가 바로 부활입니다. 하지만 부활을 믿고 또 받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수많은 뼈들을 바라보면서, 그 뼈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에제키엘 예언자의 꿈속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만약 우리의 눈앞에 있는 수많은 뼈들에, 살과 근육이 붙어, 다시 사람의 모습이 되는 것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기쁨과 희망보다는 더 큰 공포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난 순간, 상식과 논리가 깨지는 그때, 우리는 더욱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지요.

 

놀라운 일


 그러나 그 놀라운 일은 예언자의 환시 속에서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하게 명하니, 말라있던 뼈에 살이 붙으며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 뒤 하느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생명을 다시 허락해주시지요. 언뜻 바라보면 공포스럽고 기괴한 이 장면은, 사실 태초에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모습과도 굉장히 닮아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영역의 것을 바라보며 두려움을 느끼고는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꿈속에 등장하는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은, 공포영화 속의 장면처럼 기괴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면이 아닙니다.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은, 바로 '생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장면이며,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장면이지요.

 

죽음과 부활


 죽음, 즉 생명이 사라진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생명을 지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은 한때 우리의 몸속에 들어와 우리 안에 머물러있지만, 서서히 꺼져가면서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알 수 없기에,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두려움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부활, 즉 생명을 다시 얻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 다시 말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던 존재를 다시 만나면서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애초에 생명을 얻어 살 수 있게 된 것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의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가능성을 육체의 보존 상태로만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육체의 상태에만 달려있지 않지요. 심지어 우리의 육체 또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명은 우리의 '숨' 즉, 하느님에게로부터 오는 무언가에 달려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느님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꿈속에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저 뼈들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을 조금은 바꾸어 생각해봅니다. "저 뼈들에 내가 숨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생명은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숨"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숨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며, 점점 숨이 사라져 가더라도, 다시 하느님께 그 숨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을 넣어주십니다. 그 '영'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이 우리의 주님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정말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영을 불어넣어 주신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도 불어넣어 주실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죽음과도 같은 상황에서 우리를 꺼내 주시는 하느님을 느낀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사라져 갈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육체적인 죽음을 겪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존재가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분명 숨은 쉬고, 심장이 뛰고 있지만, 우리 안의 무언가가 고갈되며 괴로움에 빠져버리는 상태에 도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뼈만 남은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를 의심하며, 하루하루를 그냥 지나 보내는 날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내가 너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맨 처음 너에게 주었던 그 숨을, 다시 너에게 불어넣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다만 그 말씀이 "나에게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스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숨이 "나의" 숨이 되기 위해서는, 그 숨결을 내가 받아마셔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었던 예언자 에제키엘처럼, 하느님의 질문을 우리의 바람이 담긴 대답으로 외쳐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살리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숨이, 하느님의 영이, 제 안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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