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종이 아닌 친구가 되는 법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5. 1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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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친구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이 말씀을 듣고 여러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며 따르다 보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명령을 실천하면 스승과 제자,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닌,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 그리고 친구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한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기를 명령하십니다. "명령"이라는 단어 안에는 강압적인 어감이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쉽게 연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종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사랑하여야 하는가


 명령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사랑에 대해 조금은 편협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친구라는 단어에서 다시 한번 사랑에 대한 시야를 넓혀봅니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자발적인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그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친구에게는 관심을 가집니다. 또한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겁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향한 도움과 관심이 계약을 통해 강요된다면 우리는 그리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계약 관계에 있는 사람을 향한 조력은 자발적인 사랑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행동과 관심의 이유에는 나의 의무와 대가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계약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약은 자발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계약을 통해 행하는 것들에 사랑이 빠져있다면, 그 안에 기쁨은 사라질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우리는 흔히 좋아하는 것을 취미라고 부릅니다. 취미활동을 할 때는 부담보다는 기쁨과 안정을 느낍니다. 반대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에서는 부담은 물론, 지루함과 회의감, 괴로움과 분노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은 취미이며, 어떠한 대가 때문에 행동을 하면 일이 된다.' 잠시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나에게 사랑은 취미일까 일일까?'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하다 보니 "자발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주체적으로 자신이 선택하여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타인에 의해, 혹은 계약에 의해 강요받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친구가 아닌 종으로 머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명령


 권위적인 목소리로 사랑을 말하던 상상 속의 예수님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명령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상태는 자발적인 하느님의 사랑의 실천으로 가능해집니다.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시는 명령은 단순히 자신과 친구가 될 만한 사람인지를 분별하는 시험과제가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서 기쁨과 생명이 흘러 넘칠 것임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명령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유일한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계시는 것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네 마음과 몸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쩌면, 공격적인 사랑이 아닌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 마태오복음 22장 37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