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표징을 요구하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10. 1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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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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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징을 요구하다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며 다양한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의 마음은 되돌아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무엇이었으며, 그 밖의 어떠한 표징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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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세대


 군중이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외에는 그 어떤 표징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그들의 어떠한 마음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표현한 것이었을까요?

 

 실제로 예수님에게 찾아와 자신의 바람들을 외쳐대던 군중은, 훗날 예수님을 못 박아야 한다고 외치는 군중이 되어버립니다. 믿기 어렵지만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며 그분을 임금으로 추앙하던 사람들과, 예수님께 저주를 퍼부으며 사형을 강요하던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이었지요. 예수님은 아마도, 군중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부터, 그들의 겉모습에 가려진 내면의 진짜 모습을 보았기에 '악한 세대'라고 표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 청하다


 우리는 예수님께, 그리고 하느님께 많은 것들을 청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성공을, 때로는 우리의 건강을, 때로는 우리의 기쁨과 만족을 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청들이 이루어지거나, 우리의 마음대로 결과가 흘러가지 않게 된다면, 그토록 매달리며 추앙하던 신의 존재를 외면하고 무시하거나, 저주하며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에게는 온갖 아름다운 모습과 듣기 좋은 말로 다가갑니다. 나에게 사랑을 줄 수 있고, 나에게 돈을 줄 수 있으며, 나에게 인정을 줄 수 있고,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대상에게는 한없이 후해지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더 이상 자신이 원하던 것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할 때면,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빠르게 식거나 적대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임금에서 사형수로


 예수님을 대하던 군중들의 태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당시 힘이 없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님이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앙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강해지는 방향으로는 힘을 사용하지 않고, 병든 사람들만 치유하는 모습을 본 군중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기만했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예수님은 그렇게 군중에 의해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을 받는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닌 것, 우리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상대의 온전한 선택의 영역의 것을 부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상대의 선택 영역이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었던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배신자로 만들어버리거나, 빚쟁이로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향해서도 말이지요.

 

악한 마음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리셨던 예수님은 그들을 '악한 세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요. 어쩌면 이 '악한 마음'은, "각자의 선택 영역"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선택의 영역'은 크게 하느님의 영역과, 우리들의 영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는 것은 우리의 선택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선택의 영역이지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받지 못해서 분노하거나 실망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택 영역을 무시하고, 그 영역마저 우리들이 선택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 겁니다.

 

 표징을 통해서만 우리의 믿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선택의 영역을 분간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선택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잔인한 고문을 받고, 형장의 이슬이 되면서까지 믿음을 지켰던 순교도, 그들의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만약 그들의 선택이 없는 죽음뿐이었다면 그들의 죽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선택하다


 믿음, 즉 신앙인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선택마저, 하느님의 영역으로 넘겨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표징을 보고도 선택을 미루고 외면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표징은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표징은 우리의 선택이 있어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며, 표징 자체가 우리의 선택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선택을 포기해버린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포기해버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이가 선택해주고 그 의견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하수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불과할 테니 말이지요. 하느님은 우리를 이끌어주며, 생명의 길로 안내해주시는 분이시지, 우리를 대신하여 선택해주시는 분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고 죽음을 선택하셨지만, 우리의 선택을 대신해주시지는 않으십니다.

 

표징의 목적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우리의 삶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화려한 빛이 쏟아지는 그러한 표징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삶 속의 표징들이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일어납니다. 다만 '표징'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이며, 표징이 외치고 있는 것은 죽음을 향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우리들의 "회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자 표징을 청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길을 걸으면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을 바란다는 것은 모순된 바람이겠지요. 하느님은 생명이 아닌,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의 방향을, 생명으로 "돌려"주시기 위해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표징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극적이고 획기적이며 찬란하게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거창한 것이 아닌


 생명을 향한 길을 외치던 요나 예언자의 말은, 당시 사람들이 듣기에 기적처럼 다가오지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표징을 보고 스스로의 상태를 바라보며 "회개"의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기적 되었지요. 우리는 표징, 즉 무언가에 대한 정답을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삶을 통해 생명의 길을 알려주시고, 또 알려주셨지만, 그 대답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유로 쉽게 묵살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예수님의 대답을 오답으로 만들고, 죽음을 향한 길을 정답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큰 존재입니다. 단순히 더 많이 알고, 더 강하기에 "큰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요나의 말보다 더 깊고 넓게 우리의 삶에 펴져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다면, 잠시 여정을 멈추고 그 불편함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말씀하시지는 않는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진정한 생명을 향한 방향은 아닌지, 무언가가 잘못된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내 멋대로 길을 만들며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되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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