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성령을 따라가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10. 1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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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비둘기
하얀 비둘기

성령을 따라가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이 구절은 성령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성령을 따르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성령은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지도 궁금해집니다. 독서 전문을 읽으며, 성령과 그 인도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독서 전문

독서 전문

성령은 무엇인가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눈으로 볼 수도 없고, 특정한 형태를 지니지도 않으며, 구체적이거나 정확한 묘사가 없는 '성령'을 따른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렵고도 혼란스러운 일처럼 다가옵니다. 갑자기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와 성령을 이야기하고, 성령을 묘사하며, 성령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진실을 알게 된 기쁨보다도, 찝찝함과 불편함으로 인한 거부감이 먼저 들 것 같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람들 앞에서 성령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우리 눈앞에 있는 특정한 것이 성령이다, 혹은 특정한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이 성령을 따르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성령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령을 따랐을 때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열매들을 나열해주고 있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삼위일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또한 무한한 하느님의 모습일 테지요. 그러한 성령을 특정한 틀에 가두어 설명하려 하거나 보여주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면서도 거짓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이 무엇이다.'라는 설명에 집중하기보다, 성령의 인도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성령의 인도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율법을 의식적으로 지켜야만 바른 길을 갈 수 있던 사람이, 성령의 인도 아래에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을 하여도 올바른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처음 무언가를 배울 때를 떠올려봅니다. 걷는 법을 배운다던가, 자전거 혹은 자동차 운전을 배울 때를 떠올려보면, 성령의 인도를 조금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처음 배우고 익숙해지기까지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기계적으로 통제합니다. 그러므로 초보자의 모든 움직임은 긴장되어 있으며, 그 과정에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초보자가 무언가를 배우는 과정에서는, 자신이 확인해야 할 상황과 신경 써야 할 행동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숙달된 후에는, 무의식적으로도 안정적인 수행을 하며,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생명의 길로


  성령은 우리가 생명의 길을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확인할 때에는, 그 대상이 어떠한 모습이고, 어떠한 형태인 지보다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주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모습이 아닌, 성령의 열매를 우리에게 나열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육의 행실이라고 표현된 길은 성령의 길과 대비됩니다.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성령의 길과 달리, 육의 행실로 인한 길은 '죽음'을 향한 길이지요. 종은 주인을 따라가고, 여행자는 안내자를 따라갑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지닌 성령과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육의 행실 중,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는 분명해질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는 어떻게 받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 특별한 기도모임에 참석하고, 특정한 행위들을 따라 하거나, 특정한 누군가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들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진정으로 성령의 열매를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일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우리의 선택과 함께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선택은 계속해서 미루면서, 남들이 말하는 특정한 행동을 통해서만 성령을 받겠다는 것은, 씨앗을 심지 않은 땅에서 열매를 바라는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성령은 여기에 있다, 혹은 저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성령의 인도가 남들의 가리킴이 아닌, 우리의 지향과 선택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는 이미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우리의 선택과 지향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해줍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을 의미하며,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의 지향을 의미합니다. 특정한 기적, 특정한 느낌, 특정한 사람 속에서 성령을 찾기보다, 우리의 선택과 지향 안에서 성령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선택과 지향 속에서 함께하는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성령의 열매를 맛보게 된다면, 우리의 삶에서 느끼는 기쁨과 행복은 더욱 커져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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