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자, 주님께로
오늘 복음 말씀 구절 속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이 구절을 읽고 나니, 무언가 뭉클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돋아나는 느낌이 듭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이 지치기도, 다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남들은 물론, 자신마저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 돌아가는 것은 무엇인지를 독서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독서 전문
병 주고 약 주기
독서에는 하느님이 우리를 잡아 찢고, 또 싸매 주시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어려움을 겪을 때, '세상이 날 버렸다'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신이 나를 버렸다'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처한 상황이 어려워질 때, 우리의 비난은 창조주이며 절대자인 하느님을 향합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분의 영향력 아래에서 일어난다는 고백일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만족스럽고 기쁜 일이 일어날 때, 그 공을 하느님께 돌리진 않았던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 만난 의사 선생님
성인이 되어 병원을 찾아가면, 의사가 자신을 고의로 아프게 한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 방문했던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왜 그렇게 미웠는지 모릅니다. 필자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다리에 종기가 생긴 적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종기가 생겨 아픈 다리를 의사 선생님은 칼로 째고, 상처를 쥐어짜기까지 했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살려달라고 비명도 질렀던 것 같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피와 고름이 다 나온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상처가 다 아물고 나중에서야, 그것이 치료과정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또 알아가는 것
독서 속 말씀에서는, 하느님을 알고 또 알아가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하느님의 전부를 알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부분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결국은 우리를 살리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잡아 째고, 또 싸매 주는 것은 하느님의 희열을 위한 과정이 아닙니다. 그 과정은 분명, 우리의 치유를 위한 과정임을 스스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번제물이 아닌 예지
하느님은 독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애절하게 이야기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번제물이 아닌 하느님을 아는 예지라고. 흔히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아는 것을 '예지'라고 부릅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세세한 사건의 내용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지는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 다시 말해, 하느님이 결국 우리를 살리시고 치유해주심을 아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예지가 없는 번제물 자체를 원하진 않으십니다.
돈, 그리고 마음
의술이 발달하고 사람을 치료하는 직업들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치료받고 치유받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에 익숙해져 갑니다. 우리를 치료해준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돈만 지불하고 감사의 마음이 없어진다면 어떠할까요? 그들의 치료가 단지 지불한 돈의 대가라고만 생각한다면 말이죠. 우리는 하느님의 이끄심과 축복을 번제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살리고 있음을 마음으로 알고, 또 감사하는 것이 하느님과 우리 모두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 하늘과 새 땅, 이상과 현실의 균형 (1) | 2022.03.28 |
---|---|
하느님이 미울 때 화해하는 법 (0) | 2022.03.27 |
말씀하신 대로 (행복의 내비게이션) (0) | 2022.03.25 |
가까워지거나 혹은 멀어지거나 (향하지 않는 것) (0) | 2022.03.24 |
완성된 율법은 무엇일까 (복종과 순종) (0) | 2022.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