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하느님이 미울 때 화해하는 법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3. 27. 11:11
반응형

두 사람의 손가락
맞닿는 손가락

새로운 피조물


 오늘 독서의 말씀 구절을 통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독서 전문을 읽어보면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독서 전문

독서 전문

그리스도 안에 있는다는 것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독서 안에서는 "화해"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화해는 예전의 불편했던 마음을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줍니다.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


 화해는 누군가와 다툰 후에야 가능합니다. 그러니 질문해봅시다. 우리가 언제 하느님과 다툰 적이 있었나요? 일상에서 누군가와 화해가 필요할 때를 떠올려봅니다. 격하게 싸우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마음의 상처를 서로 주고받는 갈등은 살아가면서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누군가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은 후, 화해보다 외면을 선택할 때도 많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느님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원래 없었던 존재인 것처럼, 애초에 만나지도 않았던 존재처럼 그렇게 외면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외면은 자신이 느꼈던 하느님에 대한 불만과 상처들도 함께 외면하도록 만듭니다.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않고, 하느님께 인위적으로 나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화해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미울 때


 누군가가 너무 미워지면 그 사람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싫어집니다. 게다가 그 사람과 대화하는 것조차 꺼려지지요. 미워하는 마음은 상대를 무시하면서 표출되기도 합니다. 하느님도 이러한 표출의 대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미워지면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가끔 화해를 위해서 중재자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가 미울 때에는 그 사람에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도 곱게 들리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지요.

 

화해로 이끄는 중재자


 예수님은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서 중재자를 자처합니다. 그 화해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였고, 그렇게 기록된 그의 삶을 통해, 지금까지도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틀릴 수 없다지만, 미워질 수는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 부모님을 미워하는 경우가 있듯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미움을 되짚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을 미워해야 할 상황일까요? 

 

의로움이 되다


 우선 우리는 하느님을 미워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화해는 본인이 상대와 다투고, 또 서운한 감정이 있음을 인정할 때 가능해집니다. 애써 쿨한 척, 모든 것에 너그러운 척, 괜찮다고 말해보지만, 사실 우리는 그 말을 시점으로 상대를 무시하고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이 미울 수 있습니다. 그분이 옳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고, 또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빼앗아가거나, 주지 않는 상황을 마주했다면, 더욱 그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점을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질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하느님이 맞고 내가 틀렸다가 아닌, '그때 그래서 그렇게 하셨었구나'라며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가 이루어진다면, 당시 이해하지 못했던 하느님의 손길을 조금씩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들이 옳았음을 알아차리고, 앞으로 하실 일들도 믿게 되든 것, 이러한 믿음이 바로 '의로움'일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갑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 창세기 15장 6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