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야, 일어나라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 구절은 힘든 상황에 빠진 우리들을, 말씀으로 일으켜주시는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예수님의 일으켜주심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죽은 이를 되살리다
예수님은 여정 중에 자신의 외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며 슬퍼하는 과부를 마주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과부를 위로해주시지요. 예수님은 과부의 슬픔을 위로한 뒤, 죽은 외아들이 놓여있는 관에 손을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놀랍게도 이러한 말씀이 있자, 장례를 치르고 있던 과부의 외아들은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깨어난 외아들을 과부의 품에 돌려주시며, 다시 자신의 여정을 이어나가십니다. 이 광경에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삶과 죽음
사람의 생과 사를 결정짓는 것은, 분명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적 앞에서 모두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상상으로만 떠올렸었던 신의 영역을 몸소 체험했기에 그러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한 젊은이가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혹은 예수님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해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세상의 전부였던 젊은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그 과부에게 가여운 마음이 들었기에, 생과 사를 넘나드는 기적적인 결정을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가엾은 마음
예수님께서 느끼신 가엾은 마음은, 우리가 타인을 보면서 느끼는 섣부른 동정심과는 굉장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마음과 그가 처한 상태를 온전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 그 당사자뿐일 테니까요.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사실 그 과부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내려오시는 결정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 대한 가엾은 마음으로 선택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냥 둘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엾음을 느끼는 마음은 하찮다고 생각하며 멸시하는 마음과는 다릅니다. 가엾은 마음은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 대상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이 공존할 때 가능해집니다.
사랑의 대가
하느님의 내리사랑은 우리의 훌륭함과 특출남의 보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신의 영역을 뛰어넘는 존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도 없습니다.
복음에 등장한 과부 역시, 예수님의 기적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과부에게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도 없었기에, 과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를 드리는 일뿐이었을 테지요.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면서 무언가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해준 것만큼 상대도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테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본다면, '진짜 사랑'에는 보답을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있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상대가 보답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사람의 가치에 기인하지 않았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었던 예수님의 마음, 즉 예수님의 선택에 기인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었지요.
사랑이 머무는 곳
하느님의 사랑은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상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랑이 머물 수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갑니다. 흐르는 물을 생각해봅시다. 흐르는 물이 병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병에 공간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 병의 마개가 열려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느끼신 가엾은 마음은, 마개가 열려있는 빈 병을 향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힘들어하던 과부의 마음에, 하느님은 슬픔을 밀어내고 사랑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찾아오셨다"는 표현은 하느님의 사랑의 "머무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기꺼이 사랑해주시지만,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마땅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머무를 수 있으며,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무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행복', '사랑',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쫓기보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머무르실 수 있기를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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