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과 죄인
오늘 복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위해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누가 의인이고 또 누가 죄인인지도 궁금해집니다. 복음 전문을 살펴보며, 의인과 죄인은 누구이며, 또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지를 생각해봅니다.
복음 전문
의인이 아닌 죄인
사실 하느님 앞에서 티 없이 깨끗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완벽한 의인이 되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의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마음이 강박이 될 때는 괴로워집니다. 청결함은 건강해질 수 있게 도와주지만, 결벽증은 오히려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그 순간조차, 완벽한 의인이 되려 하지는 않았는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의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느님 앞에서 완전무결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통해서 점차 의인이 되어가는 것이지, 어떠한 시점에서 의인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그 사람 자체의 절대적 권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대로 잘 가고 있는 사람이, "의롭다"라고 불리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의사와 병든 이들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죄인의 관계를 의사와 병든 이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의로움을 건강에 비유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과거에 의사를 언제 찾아갔는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병원은 보통, 자신이 건강하다고 느낄 때가 아닌, 아프다고 느낄 때 찾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때는, 아픈 상태에 있는 사람이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인이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느낄 때, 예수님께 치유받기 위해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병원을 가는 이유
환자가 병원을 가는 이유는 건강해지기 위함입니다. 건강해진 다음에 병원을 가는 게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막상 우리는 이를 간과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죄인들을, 병원에 가려는 환자들을 나무랄 때가 있습니다.
죄의 다른 이름
죄는 하느님을 만나게 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통칭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죄를 '부끄러움'이라 불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신경 쓰지 않은 소홀함은 부끄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픈 상태 자체를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아픈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아프다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몸의 신호일 뿐이니까요.
멀어지게 하는 것
의로운 일처럼 보이는 행동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면, 그 행동 자체는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의로움은 하느님과 함께할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의로운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진다면, 그것은 우리 영혼의 건강을 헤치는 것입니다.
과도한 집착
적당한 운동은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지나친 운동 자체에 대한 집착은 우리 몸을 해롭게 합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의로움을 위해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이 이었습니다. 우람한 의로움의 근육을 뽐내며,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과도한 운동과, 건강보다 보이는 외모에 대한 집착은 그들을 건강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
복음 속 예수님은 의인들이 아닌 죄인들을 위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죄인은 잔치에 초대된 세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건강하지 않은, 정말로 의사가 필요한 사람들은, 자신이 아픈지도 모르는, "스스로가 의인인 줄 아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나만의 힘으로
의인이 되는 것은 자신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이 자생력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말이 되겠지요. 의롭게 되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만 하려고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뒤틀리게 됩니다. 당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평생을 의롭게 살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힘써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대우받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할 수도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자신의 건강을 위한 일들은 타인의 평가에 치우쳐지지 않습니다. 대우받기를 원하고, 타인의 이목이 집중되기를 원하다면, 그 행동은 자신의 건강을 위한 행동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건강을 해롭게 하는 큰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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