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시험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과 사랑)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3. 6. 23:39
반응형

실험하고 있는 사람
무언가를 실험하고 있는 사람

시험하지 마라

 오늘 복음 말씀 구절에서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문득 "시험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스칩니다. 누군가를 시험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복음 전문을 살펴보며 생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누군가를 시험하는 것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시험들을 마주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시험할 때도, 또 우리가 누군가를 시험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누군가를 시험하는 경우에 관하여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때로 상대방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그 상대를 시험합니다. 그 사람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험하기도 하며, 그 사람이 가진 것이 정말 나에게 적합한지를 시험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시험한다는 것이 무례하고, 또 냉철하게 와닿을 때도 있지만, 한 번쯤은 시도해보아야 안심할 수 있는, 하나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여질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

 사람을 시험하는 것이 가능할 수는 있겠습니다. 반면에, 신을 시험하는 경우는 어떠할까요? 사람을 시험하는 것과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을 시험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시험이라는 말은 평가라고 바꾸어 불리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 상대보다 더 큰 존재일 때 가능해지는 듯합니다. 신을 평가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교만'이 싹터있습니다.

 

시험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사실 가능의 여부를 떠나서,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존재라 불리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다고 일컬어집니다. 유치원생이 선생님을 뽑는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상황과 빗댈 수 있겠습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평가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영역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지요. 


유혹 앞에서

 복음에는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하는 다양한 상황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가면서 다양한 유혹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하느님을 떠보는 과정에서 오지 않습니다. 유혹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께 도우심을 청할 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을 시험하는 것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상대방의 사랑을 시험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랑하는 사이에서 이러한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날 이래도 사랑할 거야?" 이러한 질문들은 사랑을 조건화시키는 질문입니다. 또한, 상대의 사랑을 사랑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증명을 통하여 사랑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둘의 사랑은 깊어지기보다 더 까다로운 증명을 원하는 억압적인 관계로 변질됩니다. 사랑을 빌미로 상대방의 목에 올가미를 거는 것은, 연인이 아닌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되려는 것입니다.

 

누가 주인인가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을 주인이라 고백합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이를 대표하는 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 내가 이렇게 해도 나 지켜줄래요?', '내가 이렇게 해도 결국에는 용서해줄 거죠?'라는 식의 떠보기는, 본인이 종이 아닌 주인이 되겠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을 사소한 조건들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받아왔고, 또 받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할 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하느님은 시험하거나 실험하면서가 아닌, 느껴가면서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