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8. 2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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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
무화과 나무

거짓이 없는 사람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서있던 나타니엘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사람에게 거짓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나타니엘의 모습을 어떻게 아셨는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나자렛 출신 예수


오늘 복음에는 필립보와 나타니엘이라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필립보는 자신이 만나게 된 '나자렛 출신 예수'가 바로 모세와 율법이 이야기한 '그분'이라는 말을 나타니엘에게 전하지요. 하지만 나타니엘은 필립보의 말만으로는 그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필립보의 말만으로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나자렛 출신'이라는 사실뿐이었습니다.

 필립보는 자신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나타니엘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판단하기를 권합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이 나타니엘 쪽으로 걸어오셨고, 예수님은 단번에 나타니엘이라는 사람을 알아봐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타니엘을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 표현하면서,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나타니엘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을 어떻게 아시냐고 되묻습니다. 이러한 되물음에는 칭찬을 들은 우쭐함도,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도 섞여있지 않았습니다. 나타니엘의 되물음에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봐 주신 것에 대한 놀라움과 반가움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렇게 나타니엘은, 출신지만 알고 있던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직접 겪을 수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예수님은 나타니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대답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나타니엘이 서 있던 지리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도, 그들이 놓인 위치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과 정신은 물질적인 것에 묶여 있고, 누군가의 마음과 정신은 사람에게 놓여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아마도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나타니엘의 마음과 정신은,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 믿고 있는 구세주에 놓여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구세주를 기다리던, 나타니엘의 마음가짐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던 것도,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던 것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지녔던 나타니엘의 마음가짐을 보고 하신 이야기였습니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은 세상을 바꾸어줄 구세주도, 자신을 치켜세워줄 구세주도 아닌, 자신을 생명으로 이끌어줄 구세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을 테니까요.

 

거짓이 없는 사람


 예수님은 분명 나타니엘을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도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나타니엘이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솔직한 사람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표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한 마음에, 다른 것들이 껴있지 않은 나타니엘의 마음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자녀가 진정한 행복을 찾길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의 욕심이 우선인 경우가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평화를 가져다 줄 구세주를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마음속에는 눈앞의 권력자에 대한 복수심이 가득 차 있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나타니엘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마음속에 그 어떤 욕심이나 야망을 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을 진정한 생명으로 이끌어줄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나타니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자신을 알아봐 준 예수님을, 곧바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가능했던 것은,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존재, 즉 자신의 구세주가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무언가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어딘지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속 집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행복을, 애타게 기다리며 살아가기도 하지요. 때로는 자신이 마주한 적이 없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 헤매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토록 기다리고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거짓 없이 염원한다면, 그것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나타니엘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의 존재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지요.

 

찾게 되다


  예수님은 나타니엘에게 그의 순수한 진짜 모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타니엘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구세주인 하느님의 아들을 한순간에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힘이 향해있는 곳으로 결국은 나아가게 되어있습니다. 나타니엘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가서 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사람은 자신이 오래도록 품고 있는 무언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기도 하지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언가를 그토록 희망하던 나타니엘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찾게 되며, 그것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에 거짓이 없을 때, 그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일


  자신을 알아보신 예수님을 보고 놀라워했던 나타니엘에게, 예수님은 더욱 놀라운 일들이 앞으로도 펼쳐질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진다면, 정말 신비롭고 놀랍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그 장면이 묘사하고 있는 시각적인 효과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나타니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것을 보았다는 표현이, 단순히 시각적인 장면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 역시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느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일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위에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장면은 크게 두 가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천사는 하느님의 소식을 전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위에 하느님의 소식이 오르내리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 다가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느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이 바라보는 진짜 나의 모습을 들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로 놀랍고도 기쁜 일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며 찾아 헤매던 것들에 대한 소식을, 하느님께 들을 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일 테지요.

 

예수님을 만나다


 나타니엘이 바라본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에서 '하느님의 아들' 변화되었습니다. 사실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라, 그분을 바라보는 나타니엘의 시각이었지요. 그러한 변화는 직접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면서 가능해졌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세상에는, 사람의 형태로 예전처럼 걸어 다니는 예수님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태초부터 '말씀'의 형태로 늘 하느님 곁에 계셨던 '예수님'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들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그토록 찾고, 또 기다리던 무언가에 대한 거짓됨이 없다면, 반드시 예수님은 그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네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마주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나누며 그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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