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를 막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는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다가오는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 예수님께 다가오는 어린아이를 막지 말라고 하시는 장면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뒤이어 이러한 궁금증도 생깁니다. 제자들은 왜 어린아이를 막으려 했을까요? 또 그러한 제자들을 예수님은 왜 말리셨을까요? 복음 전문을 읽으며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상상해봅시다
복음 속 상황을 상상해봅시다. 당시 예수님은 많은 가르침과 치유를 행하는 위대한 존재로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아픔을 치유받기 위해서 먼길을 걸어왔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길을 나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도착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지도 멀쩡하고 가르침을 알아듣기에는 어려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단지 쓰다듬어달라고 찾아오다니, 제자들이 막을 만도 했을 것입니다.
줄을 서시오
한정된 자원을 사용할 때는 늘 순서가 있습니다. 휴게실 화장실에서도, 음식점에서도, 매표소에서도 우리는 차례를 기다립니다. 신에게는 그러한 줄을 설 필요가 없을 테지만, 당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예수님은 몸이 하나였기에,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깃에 손이라도 닿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인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언짢아하신 예수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막는 것을 보고 언짢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언짢아하신 그 이유를 추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린아이가 쓰다듬어달라고 다가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급한 이유들과 비교했을 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떠한 극적인 변화를 원하고 다가온 것이 아니라, 마냥 예쁨을 받기 위해서 온 것처럼 생각됩니다.
어린이와 같이
이후에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놀랍습니다. 제자들이 막았던 어린아이들을 보며,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어린아이와 같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냥 순수하고 여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부족함을 느껴서가 아닌 좋아서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광경을 보고,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자신이 부족함을 느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좋아서 다가왔구나.' 그러곤 자신이 하느님을 찾았을 때를 떠올려봅니다. 아플 때 하느님을 찾았으며, 두려울 때 하느님을 찾았고, 괴로울 때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무언가가 필요할 때 하느님을 불렀으며, 죄책감이 느껴질 때 하느님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복음 속 어린아이들은 달랐습니다. 마냥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서 그분 앞에 나아갔습니다.
쓰다듬어준다는 것
쓰다듬는 행위는 보통 따뜻한 사랑의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어른이 아이를 예뻐할 때, 연인이 서로를 사랑할 때 볼 수 있는 행동입니다. 상대의 손길을 느낀다는 것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상대의 손길로 그 대상의 사랑을 기억함과 동시에, 그 대상이 내 곁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하느님을 떠올리는 것
하느님을 떠올리는 것도, 어찌 보면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떠올릴 때, 하느님을 찾아갈 때, 어떠한 마음으로 다가갔는지를 떠올려봅니다. 하느님께 다가가는 우리의 마음에, '당신에게 무엇을 원합니다'라는 마음보다, '당신을 기억하고 느끼고 싶습니다'라는 마음이 더 커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하느님의 손길
천주교의 미사와 고해성사는 하느님께서 허락해주신 축복이라 전해집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둘이 많은 부담과 의무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그 자리가, 하느님의 쓰다듬을 받는 자리가 될 수 있다면, 자꾸만 잊어가는 하느님의 손길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라면, 미사와 고해성사가 부담과 짐만으로 생각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집이 내 집이 되려면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이는 하느님 집에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집이 내 집 같지 않고, 있어도 불편하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느님 집이 내 집처럼, 아니 나의 집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만날 때 기뻐야 할 것입니다. 엄한 호랑이 선생님의 집에 사는 것이 아닌, 병원의 의사 선생님의 집에 사는 것이 아닌, 함께할 때 행복을 느끼는 하느님의 집에 살고 싶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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