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얼마나 용서해주어야 하는가 (자비를 베푸는 것)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3. 2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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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아이
어깨동무하는 두 사람

자비를 베푸는 것

 오늘 복음 말씀 구절에서는 "자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하지 않느냐?"라는 말씀 구절이, 누군가를 용서하는 상황을 떠오르게 합니다. 복음 전문을 읽어보며,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용서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용서해주는 것

 베드로는 예수님께, 누군가가 자신에게 죄를 지었을 때 얼마나 용서를 해주어야 하는지를 물어봅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일곱 번이나 같은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왜, 베드로에게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를 위한 것이 아닌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일곱 번, 아니, 일흔일곱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죄를 지은 상대가 아닌 자신을 위한 행위인 것이지요.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내면적으로 혼란과 아픔을 겪습니다. 상대에 대한 화는 그 사람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우리 안에서 많은 것들을 망가뜨립니다. 용서를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것은 상대가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일흔일곱 번

 일흔일곱 번을 용서한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그를 용서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조건 용서하라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일흔일곱 번의 용서 과정에서 우리가 직접 느끼는 무언가를 바라신 것일까요? 일곱 번만 용서해야지라는 생각을 갖고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사실 참는 것에 가까운 용서가 될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향한 분노를 찾는 것만으로 완성되지는 않아 보입니다. 용서는 참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제공한 것만 같은 그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일 테니까요.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를 행위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알려주십니다. 일흔일곱 번의 용서는 달성 과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용서를 위한 훈련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것처럼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행해왔던 여러 가지 실수와 잘못들을 생각해봅니다. 그 실수와 잘못들은 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한 일일 수도 있겠지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저지른 죄 자체만 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느님이 베푼 자비를 보라고 이야기하시지요. '너희도 똑같은 죄인이다'가 아닌, 너희도 하느님처럼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