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11. 1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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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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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주다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면...!" 이 구절은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진정한 평화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이스라엘 도성을 바라보며 울고 계십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도성에 닥칠 불행을 안타까워하시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미래에는 온갖 폭력과 멸망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그러한 불행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에 나타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평화를 꿈꾸다


  오랜 역사 동안 많은 사람들은 평화를 꿈꾸어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많은 많은 이들이 평화를 위해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를 추구하면서, 진정한 평화가 어디서 오는지는 크게 궁금해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평화"는 "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진실처럼 굳어져버리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당장의 평화는 보통, "힘"을 통해 이루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승자와 패자가 확실하게 정해진 싸움은, 일시적이더라도 분명 평화를 가져다주니 말입니다. 그러나 싸움을 잠시 멈춘 상태를 "진정한 평화"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반복되는 싸움


 우리나라는 분단국가이며, 전쟁을 잠시 멈춘 "휴전 국가"입니다. 말그대로 잠시 싸움을 멈춘 상태인 것이지요. 실제로 인류의 역사에서는 수많은 전쟁과 휴전이 발생해왔습니다. 서로의 안위를 위해 맺었던 평화 협정이 절대적이었던 적은 없었으며, 전쟁으로 이룩한 평화는 다시 전쟁으로 인해 깨져갔지요.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


 분명 우리가 겉으로 마주하는 평화는 "힘"을 통해 유지됩니다. 하지만 힘을 통해 이룩한 평화는,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평화도 함께 깨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속 평화도 "힘"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영원히 평화로울 수 있는 "진정한 평화"는 없는 것일까요?

 

 과거의 기록들을 되짚어보아도,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힘이 영원히 지속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평화를 유지하고자 길러낸 누군가의 "힘"이 영원했던 적은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점을 미루어볼 때, 어쩌면 이스라엘 도성의 멸망은 결국에는, "다가올 수밖에 없는 미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사람의 죽음처럼 말이지요.

 

불행은 저주?


 만약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알아보았더라면, 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는, 영원히 행복한 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이 마주했던 불행한 미래는 단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대가로 내려진 저주였을까요? 세상에 영원한 권력이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분명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었을 테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이 그토록 안타까우셔서, 이스라엘 도성을 바라보며 슬피 우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평화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면"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근원은 우리가 지닌 "힘"이 아니며, 우리가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께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믿음에서 오는 평화


 어린아이들은 다소 과격해 보이는 놀이기구를 웃으면서 재밌게 즐깁니다. 아이가 그 놀이기구를 기쁘게 탈 수 있는 것은, 착용하고 있는 안전장치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우리는 건물을 오르내릴 때 승강기를,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자동차를 이용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용하면서 매번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대한 "안전성"을 어느 정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차린다는 것


 어쩌면 하느님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그 어떠한 상황이라도 우리의 존재를 망가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던 수많은 제자들도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지만, 그것을 영원한 멸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괴로움에 빠져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다시 말해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우리의 생명과 평화가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바라보지 못했을 때, 불안해지고 불행해집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도성을 바라보고 혀를 찬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슬퍼하셨던 것은 그들의 불안과 불행을 함께 느끼셨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마주하는 상황을 멸망이라고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실제로" 그 상황이 멸망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믿음이 현실이 되다


 예방 접종 주사를 맞기 위해 남녀노소는 모두 병원을 찾아갑니다.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우리의 살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고통을 주는 순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지나면 괴로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고통이 버틸만한 고통이 됩니다. 하지만 눈앞의 주삿바늘에만 몰입되어 주삿바늘이 몸에 닿기도 전에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는 아이에게는, 그 순간이 울다가 탈진하여 실신할 만큼 괴롭고 처참한 지옥이 되어버립니다.

 

 아이의 부모는 이러한  아이의 모습을 보고 절대 비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그 순간만큼은 실제로 지옥을 경험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부모는 그러한 아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계속해서 달래주며 꼭 안아줍니다. 만약 이때 아이가 부모의 손길을 느끼고 안정감을 되찾는다면 평화로워지겠지만, 부모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고 주삿바늘에만 매몰되었을 경우에는 그 어떠한 위로나 손길도 그 아이를 지옥 같은 상황에서 꺼내 줄 수 없게 됩니다.

 

일시적인 평화가 아닌


 세상 속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평화는 결국, 마찰과 불만이 가려져있는 "일시적인 평화"일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평화는 언젠가는 걷히게 되고, 내재되어있던 불만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만약 우리 마음속 평화의 근거를 일시적인 것들에 두었다면, 이 과정에서 우리의 평화도 함께 사라집니다. 

 

 사람은 무섭고 불안한 상황에서 자신이 평화의 근거로 두었던 무언가를 찾아갑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함께하심에 그 근거를 둘 수 있다면, 절대 사라지지 않을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불변하시며 영원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또 늘 우리와 함께해주심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평화는 절대 깨지지 않는 "진정한 평화"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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