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원수를 사랑하라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유)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2. 2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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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난 사람
화난 사람

참 어렵도다!

 오늘 말씀 구절은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합니다. 천국 가기가 정말 어렵다고 느껴지는 구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데, 어찌 '원수를 사랑하라'는 엽기적인 일마저 요구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말씀 구절이 등장하는 복음 전문을 살펴보며, 오늘 말씀 구절의 의도를 살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위선을 강요하는 것?

 애인은 사랑스럽지만, 원수는 밉습니다. 어찌 보면 그게 더 자연스러운 듯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위선을 강요하시는 걸까요? 이웃을 사랑하기만도 벅찬 우리에게 도대체 왜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하실까요. 복음은 사실 우리의 이러한 의문들을 예측이라도 한 듯, 하나하나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의 조건

 우리는 사실, 사랑을 줄 때 그 대상이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인지 아닌지를 늘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조건들을 충족하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복음은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라며 이러한 대가성 사랑을 경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도로 받을 수 있는 것을 꾸어준다는 표현으로, 이러한 사랑의 형태는 극히 본능적인 단계라고 짚어주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거래인가

 사랑에는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이를 거래라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사랑의 거래를 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랑 앞에서 우리가 줄 것이 있을까?. 사랑이 거래가 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집니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어머니가 사랑을 거래라고 생각하며 아기를 키운다면, 미래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아기들에게는 젖을 주지 않고 굶어 죽이겠지요. (실제 동물들은 그런 선택을 합니다. 본능적인 단계의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주고 주고 잊어버리는 것

 한 어르신이 사랑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주고 주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사랑놀음은 호구 짓이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거래로 생각하는 그 고정관념을 부수어야, 진정으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평화를 빌면 안 받으면 내 것

 평화를 남에게 빌었을 때, 그 사람이 받지 않아도 그 평화는 자신의 것이라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했을 때, 받아주지 않는다면 불쾌해집니다. 이는 인사를 거래로 생각할 때 드는 마음입니다. 만약 기쁜 마음으로 이웃에게 인사하는 것을 오늘 하루의 자신에게 인사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들이 인사를 받지 않아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나를 위한 사랑

 어찌 보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더 큰 사랑"을 가르쳐주시는 것 같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원수를 미워하며 망가져가는 우리를 걱정하기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을 강요하는 그럴싸한 이타적인 말이 아니라, 온전히 우리 자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문드러지는 것

 욕하면 가장 가까이 듣는 귀는 자기 귀입니다. 원수를 저주하는 과정에서 그 저주를 담고 있는 그릇은 자신입니다. 화병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원수에 대한 미움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일은, 사실상 자기를 고문하는 행위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강자의 여유로움

 복음에는 한쪽 뺨을 때리는 원수에게 다른 뺨을 내미는 행위가 등장하지만, 이는 원수의 폭력을 허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통을 억누르고 희생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복음에서 나열한 행위는 "여유로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날뛰어도 저를 헤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리 분하다면 그리 하세요. 저의 평화는 제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망가뜨릴 수 없습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

 필자는 "사랑에는 당연히 조건이 있지!"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동화 속에만 존재하며, 현실에서는 그 대상이 누구이든, 사랑받을 짓을 해야 사랑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판단해왔던 것 같습니다. 사랑에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결국 칼날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판단의 칼날은 사용할수록 예리해집니다. 남들에게만 들이대던 그 칼날은 점점 예리해져서 자신을 위협하는 흉기가 됩니다.

유다와 베드로

 유다와 베드로는 모두 하느님을 배반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배반한 자신을 직면했을 때, 서로 다른 선택을 하여 상반된 길을 걷습니다. 유다는 형편이 좋지 않은 여인이, 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는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타산에 맞지 않는 사랑 거래였기 때문입니다. 훗날 유다는 자신이 한 실수가, 하느님과의 사랑 거래에서 갚을 수 없는 큰 빚이 되었다고 느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배신한 자신에게 세 번이나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 예수님을 마주합니다. 이때 베드로는 사랑함에 있어 그 조건과 이유가 없음을 체험하고 또 받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꾸어주어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언젠간 무너질 자신을 위해 들어놓는 보험과도 같습니다. 꾸어주라는 표현은 이를 더욱 체감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상황을 마주할 때 스스로를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다면, 자신이 원수에게 해왔던 그 방식을 자신에게 자행하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보험이 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원수마저 사랑해본 경험은 자신이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항상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힘을 길러줍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받을 수 있음을 느끼는 상태야 말고 진짜 천국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