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라고?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3. 12. 11:15
반응형

네 명의 사람들
네 명의 사람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복음 말씀 구절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 나니,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지가 궁금해집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이웃을 사랑하는 것

 복음 속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도 어려운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한 지붕에서 나고 자란 형제들도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평생을 동고동락한 배우자도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평생을 함께 걷자고 약속했던 하나뿐인 친구도, 그 사이가 틀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라니, 사랑의 실천 범위가 정말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누가 이웃인데

 이웃을 정의하는 말들은 아마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 자신과 교류하는 사람들을 칭할 수도 있고, 거주지 근처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말할 수도 있으며, 약속을 잡아 만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지요. 하지만 분명한 건, 이웃은 위협을 느끼지 않는, 특정한 친분 조건을 달성한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어려운 과제를 주시는 듯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도 벅찬데,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냐는 말씀을 덧붙이시며, 원수를 사랑해야 함을 더욱 강조하는 듯합니다. 

 

완전한 사람

 복음 속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여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우리는 "완벽"한 사람과, "완전"한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달성하며 우리는 흔히 "완벽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합니다. 완벽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지치고 힘들어집니다. 완벽에 대한 갈망은 집착과 강박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완벽해지려는 사랑

 사랑도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뒤틀리게 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봅시다. 그 사람에게 완벽한 사랑을 제공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에게 무리가 되더라도 무언가를 계속 채워주고, 그 대상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방향을 떠올리게 됩니다. 완벽한 사랑은 무언가를 계속 더해주는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완전한 사랑"은 이와 다릅니다.

 

완전한 사랑

 완전한 사랑은 무언가를 더해가는 것보다, 오히려 덜어내 가는 사랑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그 대상에 대해 지니는 욕심을 덜어내고, 고정관념을 덜어내고, 환상을 덜어내고, 뒤틀린 책임감을 덜어내고, 소유하려는 마음을 덜어 내다 보면 완전한 사랑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더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이러한 측면으로 접근해본다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어려운 과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틀과 조건을 깨부수어 주시며, 사랑을 더욱 쉽게, 건강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힘을 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춤을 출 때 온몸에 힘을 준다면 몸이 경직되어 춤을 추기 어려워집니다. 사랑이라는 춤을 추려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힘을 더욱 주는 것이 아닌, 불필요한 힘들을 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