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10. 4.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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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연을 날리는 아이

주님의 발치에 앉아


 오늘 복음 말씀에는 이러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의 곁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복음 전문을 읽으며,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마리아와 마르타


 예수님은 말씀과 기쁨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마을들을 돌아다니셨습니다. 그 여정 중에 마리아와 마르타가 살고 있던 마을을 방문하셨고, 마르타는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집으로 모시게 되었지요. 마르타는 자신이 예수님을 초대하였으니, 집의 주인인 자신이 손님인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마르타는, 자신이 원하던 것들은 제쳐두고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 어떠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만 집중하고 있었지요.

 

 마리아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마르타는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것도 자신이고, 예수님을 위해 대접하고 준비하고 있는 것도 자신인데,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혜택을 진정으로 누리고 있으면서도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는 동생이 옳은 것입니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테지요.

 

수많은 걱정과 염려


  마르타는 투정 부리듯 예수님께 한탄합니다. 자신의 입장에 힘을 실어줄 예수님의 한마디를 기대하였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마르타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다는 말씀과 함께 말이지요.

 

 우리 역시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많은 일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 예수님은 마리아가 아닌, 마르타의 초대를 받고 집에 오셨습니다. 마르타는 분명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었을 테지요. 그러나 정작 마르타는 자신이 해야 할 것만 같은 일들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격이 돼버렸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위하여, 무언가를 계속해서 해나갑니다. 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쌓여가는 일 때문에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는 모순적인 경우를 겪을 때가 많습니다. 행복을 위해 돈을 벌면서, 정작 돈을 버는 과정이 행복을 깨뜨리는 경우도 있고, 가족을 위해 일을 하지만 정작 일 때문에 가족들에게 소원해지는 경우도 있으며, 하느님을 느끼고 예수님과 함께하고자 성당과 교회에 가지만, 그 안에서 겪는 수많은 일들로 인해 냉담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행복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이 그 과정에서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를 안다면, 우리에게도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쥐가 쥐약을 먹다


  최초의 사람은 "하느님과 비슷해지기 위해" 선악과를 먹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그러한 선택이 불행으로 이어졌던 것은, 자신의 기대와 선택의 결과가 매우 달랐기 때문이었지요.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 외의 욕심들은 그들의 눈을 가렸고, 자신이 선택하려 하는 그 대상의 진실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들의 선택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배고픈 쥐는 "살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던 쥐의 눈앞에는 아주 맛있어 보이고 영양가 있어 보이는 먹이가 펼쳐집니다. 에너지가 고갈된 쥐는 "살기 위해서" 그 먹이를 먹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먹이을 먹었던 그 쥐는 얼마 후 고통 속에서 죽게 됩니다.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쥐약을 먹은 쥐의 입장에서는 "살기 위해서" 쥐약을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는 자신이 바라던 것의 정반대로 이루어졌지요.

 

선택과 행복, 그리고 몰입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선택할 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진정한 바람과 그 대상에 놓인 진실을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하거나, 선택을 하고자 하는 대상에 담긴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어쩌면 행복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은 걱정과 염려가 없는 상태, 즉 "몰입"과도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즐거움과 성취감을 목표로 두는 놀이에서도 우리는 "몰입의 상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몰입의 대상


 

그러므로 행복을 향한 여정에서는 "몰입"의 대상이 정말 중요합니다. 몰입의 대상을 설정하는 것은 자신의 최종적인 목적지를 선택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몰입의 대상과 점점 가까워지게 되고, 또 그 대상과 닮아가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몰입 대상이 영원하고도 진실된 존재라면, 우리의 "몰입 상태"는 끊기지 않는 행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에게 몰입한 상태, 즉 "예수님과 함께함"에 몰입한 상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언니인 마르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를 무시하거나 외면한 것도 아니며, 단지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참된 행복", 즉 "예수님과 함께함"의 여정에 "몰입"했던 것입니다. 만약 언니인 마르타도, 예수님께 무언가를 대접하며 드리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함"을 느낄 수 있었다면, 마르타는 마리아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일에 "몰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가 선택한 몫은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함께하심"에 몰입된 사람은, 그 행복을 빼앗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요?

 

좋은 몫을 택하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자신의 집을 방문한 동안, 마리아는 자신이 가장 원하는 선택을 하였고, 마르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바라던 일에 몰입하였지만, 마르타는 그러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가장 원하던 바를 선택하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대상에 몰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외치고 갈망하던 "행복"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행복을 좇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일들과 걱정과 염려에 휩싸여 행복을 가리지 않도록,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시간을 마련해봅니다. 또한, 우리가 선택하는 대상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이끄심도 함께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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