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묵상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미카엘의 하루 묵상 2022. 7. 1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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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평화가 아닌 칼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거룩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주려는 것이 평화가 아닌 칼이라는 말씀은,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와 칼이 무엇일지, 복음 전문을 읽으며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복음 전문
복음 전문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자신이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주러 우리에게 왔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직접적으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칼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특징이 떠오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날카롭고 예리한 칼과도 같아, 우리 마음속을 뼈와 살을 분리하듯 구별해내신다는 말씀도 등장합니다. 분명, 칼은 무언가를 도려내고 분리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의사 선생님의 칼


 살인자의 손에 든 칼은 흉기가 되지만, 외과의사의 손에 든 칼은 환자를 살리는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자연적인 치유로는 환자를 살릴 수 없을 때, 의사는 수술이라는 개입을 통해 환자를 치료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몸에 흉터가 남는 것이 싫어서, 혹은 겁이 나고 무서워서, 수술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긴급한 상황에서 의사는, 그러한 환자들의 편의를 모두 받아주며 수술을 늦추지 않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따끔한 충고와 설득으로 수술을 진행합니다.

 

 자신이 아픈 상황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환자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며 그냥 살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병이 스스로는 물론,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작정 편안함만을 추구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순한 편안함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단순한 편안함으로만 생각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 이면에는, 이러한 편안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깔려있지요.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지속될 수 있는 편안함인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거짓된 평화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거짓된 평화는 겉으로만, 혹은 잠시 동안만 드러나는 평화를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을 지속하던 두 국가가 휴전협정을 맺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평화가 아닌 잠시 전쟁을 멈추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시적인 평화이지요. 일시적인 평화는 서로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심이 바탕이 되어있는 온전하지 못한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는 어떠한 과정을 모두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쌓이고, 각자의 욕심보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음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평화 협정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예수님도 분명, 고난과 역경을 모두 겪고, 죽음과 부활을 모두 지나고서야, 제자들의 앞에 나타나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평화를 위해


  예수님은 거짓된 평화에 속지 않고, 참된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평화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참된 평화를 알았더라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이끄심이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예수님은 하느님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면, 그 사람과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만큼이나 충격적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어보면, 그 의도와 뜻을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주 밀접하게 다가갈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하며, 어쩔 때는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해버리기도 하지요. 그러나 자신이 사모하던 사람일수록, 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엄청난 분노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상대에 대한 과도한 사랑이 균형을 잃어버린 것임을 나타내 줍니다. 균형을 잃어버린 타인에 대한 사랑은, 타인의 고유영역과 자신의 고유 영역을 혼재시켜버리기도 합니다.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에도, 어떠한 적정 선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이러한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선을 그어주며 분리해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합니다. 그 대상이 아무리 사랑하는 자신의 자녀라고 하더라도, 상대의 삶과 여정 속에서 대신하여 운전대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진짜 행복과 진짜 평화는 스스로 그것을 느끼고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여정 안에서 누군가의 개입과 강요는 삶의 주인공을 방해하는 꼴만 될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는 다듬어지고, 분리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정화와 교정의 과정은 스스로 수행할 수 없기에, 예수님은 칼을 쥐고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받아들임


  예수님은 "받아들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언자를 예언자로, 의인을 의인으로, 예수님의 제자를 예수님의 제자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받을 상을 함께 받을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 자신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섣부른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무언가가 일어나도록 맡길 수 있는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상황을 마주합니다. 때로는 불쾌함과 불안함을 가져다주는 그 상황들을, 모른척하고 회피하면서 거짓된 평화 속에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예수님께 맡기고 받아들이며, 흘러가는 대로 두어본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계획하셨던 모든 상들을, 때가 되었을 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수술이 끝나고 몸이 점차 회복되어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신뢰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칼처럼 우리를 분리하고 도려내는 상황들이, 결국은 우리가 참된 평화와 행복을 깨닫기 위한 과정임을 믿으며, 오늘 하루도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내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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