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다
오늘 복음 말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이 말씀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보호자는 어떤 존재이며, 또 세상의 그릇된 생각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러한 호기심과 함께, 복음 전문을 읽으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복음 전문
어디로 가십니까?
오늘 복음에는 이별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제자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이제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제자들은 근심에 가득 차며 어디로 향하는지를 묻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말씀하신 것을 알고 그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향하는지 질문하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은 아마도 이미, 예수님이 가는 그 길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향하는 곳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과의 이별은 죽음과 끝으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함께 길을 걷고 대화를 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예수님이지만, 결국 우리처럼 죽어 없어질 존재라고 판단했기에, 그들은 또다시 근심에 빠졌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믿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세상의 고정관념은 무너뜨리기 어려운 장벽이었나 봅니다. 우리도 막연하게 천국에 계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가기 위한 방법도 막연하게 생각하지요. 의로운 일을 하며, 죄를 짓지 않고, 심판 때에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시며, 보호자, 즉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어, 세상에서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들을 바로 잡아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보지 못한 곳
우리는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해 각자만의 상상을 펼치고는 합니다. 그러한 상상 속에서 우리는, 그곳을 극대화하기도, 왜곡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그곳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일 겁니다. 하느님의 곁에서 내려오신 분, 즉 예수님은 그곳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그곳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무시무시한 재판과 멸망과 소멸, 또는 허무와 공허함만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각자의 생각에만 의존하였습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함께 계셨던 존재들입니다. 삶에서 느꼈던 배움과 죽음을 통한 받아들임이 모두, 하느님 곁을 향한 과정임을 믿는다면, 그 길에 대한 근거는 자신의 상상이 아닌, 성자이신 예수님과, 성령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보호자이신 성령
예수님은 지금의 이별, 즉 자신의 죽음이 제자들에게 이롭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떠난 후, 제자들에게 보호자이신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시작으로 우리는 저마다 천국에 대해 상상합니다. 그러한 상상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릇된 생각도 함께 자라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면서, 우리에게 자율학습의 시간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배운 가르침을 토대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어갑니다. 그렇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가다 보면, 성령이라는 또 다른 선생님이 나타나십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떠나는 것이 이롭다
자신이 지금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말씀은 어릴 적 하나의 일화를 떠오르게 합니다. 갓난아기는 처음에는 두 다리로 걷지 못합니다. 따라서 부모님, 혹은 보행기의 도움을 받아서 걷는 법을 배우지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도움으로 걸어 다닐 수는 없습니다. 아이의 두 다리에 어느 정도 지탱할 힘이 생기면, 아이의 부모는 잠시 아이와 떨어져 있습니다. 아이는 여태 자신이 배운 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걸음걸이를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아이는 자라서 두 다리로 혼자 걸어 다닐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배운 걸음걸이가 늘 바른 걸음걸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걷다 보니, 한쪽에 균형이 치우쳐지거나, 특정 부위에 무리를 주는 걸음걸이로 변형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몸에 아픈 곳이 생기고 나서야, 그는 걸음걸이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그렇게 올바른 걸음걸이에 관심을 갖게 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걸음걸이를 교정할 수 있게 됩니다.
잘못 생각하는 이유
복음의 끝부분에서 예수님은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죄, 의로움, 심판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이유를 말씀해주시지요.
첫 번째,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예수님, 즉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드러내 보이면 안 되는 것, 더러운 것, 없애야 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보다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보듬어주실 것을 믿지 못한다면, 죄는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잘못에 대한 뻔뻔한 태도를 허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은 물론, 죄를 지은 대상에게도 진심으로 뉘우칠 때, 오히려 그 전보다 더욱 하느님과, 그리고 그 대상과 가까워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의로움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더 이상 예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의로움을 누군가에게 보일 때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예수님, 즉 신이라도 그 의로움을 봐주어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의로움은 누군가가 알아줄 때 가치가 생기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의로움은 그 자체로 우리를 건강하게 해 줍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만 자신의 몸을 씻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씻는 것이 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위생을 위해, 그리고 씻는 동안의 즐거움으로 인해 몸을 씻는 사람은 씻는 행위가 진정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의로움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며,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될 때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심판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미 세상의 우두머리가 심판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우두머리는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우두머리가 속해 있는 집단, 즉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는 심판은, 무섭고 두려운 끝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범죄 조직을 떠올려봅시다.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질을 잡아두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 인질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났지요.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는 자신이 지은 범죄로 인해 훗날,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인질의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존재가 누군가에 의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확인의 절차를 걸쳐, 인질을 풀어주기 위해 인질들이 법정으로 소환됩니다. 그러나 법정으로 향하는 인질과 아이들은 자신도 범죄조직의 우두머리처럼 될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워합니다. 그 재판이 자신들을 자유롭게 해 줄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말이지요. 어쩌면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 자체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닌, 우리를 괴롭게 하는 그릇된 생각들을 제거해주는 과정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 마태오복음 13장 3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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